시작-3
생동감 넘치는 시장의 소음을 뒤로하고 혜진과 현수는 한산한 도로로 나왔다.
인적이 드물고 점심시간이 지난 거리에 알루미늄 새시로 된 백반집이 나란히 줄지어 있고 허기져 있던 둘은 그저 무심히 식당으로 들어가서 밥을 시켰다.
바삭하게 잘 구워진 부세를 한 젓가락 하고 밥 한술을 뜨는 순간 생각보다 자신들이 많이 허기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누구라고 할 것 없이 허겁지겁 식사를 마쳤다. 식당 문을 나와 송정 바다로 향해 이동하는 전철은 한산했고 둘은 식곤증으로 노곤해져 잠시 졸았다. 환승을 하고 내린 버스에서 걸어 바닷가에 도착한 둘은 푸드트럭에서 커피를 마시며 시원한 바닷바람을 한동안 말없이 맞았다. 현수는 갑자기 자신의 백팩을 열어 잔뜩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혜진에게 선글라스를 씌워 주었다. 일몰 몇 시간 전 바다의 윤슬은 강력했다. 혜진은 희미한 미소로 현수에게 답했고 혜진은 윤슬로 가득한 바다로 시선을 고정하고 말했다.
"세차장에 걸린 반짝이 먼지떨이 같네요... 윤슬이.. 꼭..ㅎㅎㅎㅎㅎㅎ"
"ㅎㅎㅎㅎ그런 것도 같네요...ㅎㅎㅎㅎ 혹시 다음에 겨울에 여행 오게 되면 차로 한번 와 볼까요? 여기저기 좀 더 깊숙이 여행하는 재미도 좋거든요."
"ㅎㅎㅎ근데... 현수 씨... 나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는데... 혹시 저한테 맘이 있으면 그러지 마요."
"왜요? 난 좋은데... 무슨 얘기하려는지 아는데요.. 혜진 씨도 그러지 마요..ㅎ 제맘이니까."
"현수 씨 상황 잘 알고 있어요. 저는 그런 상황 감당할 자신도 없고, 그런 차이나는 상황에 대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성향도 못 되니까 하는 말이에요."
"어?!!!!! 혜진 씨!!!! 우리 결혼까지 할 수 있는 거죠? 그럼? 그렇죠 그렇죠?!!!!"
"아니!!! 그게 아니잖아요?"
"거 봐요.. 아니잖아요..ㅎㅎㅎㅎ그냥 편하게 이렇게 가끔 같이 여행 가고 맛있는 것도 먹고, 술친구도 하고 그러는 건데 뭘 그렇게 멀리까지 가요? 돌아오세요. ㅎㅎㅎㅎ"
혜진은 왠지 머쓱해져 시원한 커피 한 모금을 크게 마셨고, 현수도 묘한 승리감의 미소로 입꼬리를 올리며 커피를 마셨다. 바다에 시선을 고정하던 혜진은 꾸륵꾸륵거리는 소리에 옆을 보았다. 여러 마리의 비둘기가 돌아다니고 있었고 유독 털을 잔뜩 부풀린 수컷 비둘기 한 마리가 미끈하고 작은 비둘기들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는 모습을 보며 '참~~ 건강하다... 건강해서 좋겠네.. 허!'혼잣말을 내뱉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
무심코 내뱉은 혼잣말에 빵 터진 현수의 웃음소리에 깜짝 놀란 혜진은 멋쩍어져 의아한 눈길로 현수를 쳐다보았다. 현수는 숙소의 체크인 시간이 훌쩍 넘은 것을 보고 이동하자고 제의했고 둘은 조금 쉰 다음 바비큐 파티에서 만나기로 하고 각자의 숙소로 들어갔다.
짐을 풀고 혜진은 잠시 누워서 음악을 듣다가 아까 모래사장에서 현수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린 일이 생각났다. 그제야 자신의 혼잣말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음을 새삼 알게 되었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필 거기서 그런 말이 왜 나와!! 에잇!!!' 혜진은 침대에서 발을 구르며 머리를 콩콩 쥐어박았다.
7시가 되었는데도 밖은 환했고, 혜진은 적당히 시원하고 건조한 바람을 맞으며 바베큐장으로 갔고, 현수는 아직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숙소로 돌아가 에어팟을 챙겨 나와 음악을 듣고 있었고 휴가철이 지나서 그런지 파티장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쭉 뻗어 있는 철로와 철로 넘어 바로 보이는 푸른 바다가 일몰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풍경은 혜진이 듣고 있던 음악과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두 곡째 팝에 집중하고 있는데 혜진의 옆으로 현수가 다가왔다. 혜진은 말끔해진 현수를 바라보고 현수 손에 들려진 접시를 보았다. 현수는 아보카도 칩이 담긴 접시를 혜진에게 내밀었다.
"시간을 잘 맞췄네요. 일몰이랑 바다랑 혜진 씨가 딱 맞아떨어지는 시간이라니.... 와아~~!! 진짜 우리 시간 잘 맞췄어요.. 그렇죠?...ㅎㅎㅎ 여기 바비큐 맛있다고 소문난 집이에요. 후식으로 로제와인도 준대요."
"여기 사장님 소품 퀄리티가 장난이 아니네요?"
"네.. 두 부부가 예술하시는 분이라서 소품이나 펜션 분위기가 고급지죠?"
몇몇 사람들이 바비큐 자리 주변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고 고기가 어느 정도 준비되어서 혜진과 현수도 그 언저리에 앉았다. 사람이 많지 않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와인에 곁들여 고기와 간단한 샐러드와 반찬을 먹었다.
해가 지고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다시 바닷가로 밤산책을 나왔다. 바다는 처음 봤던 고요함으로 이따금씩 옅은 파도소리가 들렸고 밤의 조명 때문에 낮보다 더 잔잔하게 아름다웠다. 왼편으로 보이는 소나무와 바위들이 모여 있는 쪽을 응시하고 걸으며 현수가 말했다.
"오늘 낮에 우쿠렐레로 연주했던 노래 들려주고 싶은데 가볍게 노래방 어때요?"
혜진도 노래를 좋아해서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어 둘은 함께 노래방엘 갔고 현수는 낮의 그 음악을 불렀다. 송정 해수욕장의 야경이 그대로 보이는 노래방에서의 노래들은 모두 감미로웠다. 그리고 혜진은 시원하게 맥주가 마시고 싶어 졌고 알코올이 더해지면서 혜진의 노래는 다소 과격한 분위기로 옮아갔다.
분위기는 자우림의 일탈에서 최고점을 찍었다. 혜진은 흥에 겨워 온돌방의 여기저기를 뛰어다녔고 줄 마이크를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노래의 후렴 부분으로 가면서 혜진이 돌리는 마이크는 미끄러져 현수의 정수리로 날아가 박혔다가 떨어졌고, 현수의 정수리는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하아..... 미.. 미... 미안해요... 현수 씨...."
"괜찮아요... 괜찮아요."
혜진은 현수에게로 달려가 현수의 이마를 문질렀다. 묵직한 무기와도 같은 마이크가 원심력의 힘을 받은 마이크가 현수의 정수리에 얼마나 큰 충격을 줬을지 생각하니 혜진은 너무나 미안했다. 그렇게 미안하다는 말을 연거푸 하고 난 후에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혜진을 보며 현수는 말했다.
"그렇게 미안하면 나 소원 하나만 들어줘요."
"그럼요.. 그럼요.. 제가 열개라도 들어드릴 거예요.. 얘기해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