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울 어느 동네 언덕에 위치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 폭우가 내린 지 며칠 지난 어느 날이었다. 택시를 타고 아파트 언덕을 오르던 때, 기사님이 말했다.
"요즘 비가 많이 와서 큰일이에요. 그래도 이 동넨 지대가 높아서 다행이죠"
그렇다. 다가올, 아니 이미 다가온 기후 위기엔 우리 집 같은 언덕배기 아파트가 강남보다 더 비싸질 수도 있겠다. 살짝은 '두고 봐'라는 생각을 한 것 같다. 동시에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폭우로 물에 잠기는 집이 있다는데 아파트값에 대한 기대라니. 그것도 내가!?
근 몇 년, 여름마다 집중호우로 온 세상이 들썩이고 있다. 저지대인 강남은 침수가 잦아졌다. 40억짜리 아파트가 물에 잠겼다며 어떡하냐고 호들갑이다. 40억짜리 고급 아파트가 물에 잠기는 일은 월세 40만 원짜리 낡은 빌라가 잠기는 것보다 더욱 안타까워해야 하는 일인 건가? 의아했다. 집이 물에 잠기는 것에 관하여 호들갑이 일어났을 때가 한 번 더 있다. 영화 <기생충>이 개봉했을 때다. 영화에 나오는 송강호의 반지하 집은 비가 오면 물에 잠긴다. 비가 와도 평온한 이선균의 높은 동네 집과 비교되는 집이었다. 그 영화 이후로 서울의 반지하 주거 환경에 대해 온갖 뉴스에서 떠들었다. 나는 세상의 이러한 호들갑을 보며 생각한다. 나의 일상이었던 어떤 삶은 세상이 이렇게도 호들갑 떨 만한 일이었구나.
경기도 어느 곳의 작은 빌라. 나의 부모는 대출을 잔뜩 끼고도 겨우 반지하 빌라밖에 구할 수 없었다. 그래도 우리 가족은 그 집에 들어갈 때 기뻐했다. 드디어 우리 집이 생겼다고. 하지만 그 집에서의 시간들은 처참했다. 장마 때마다 물을 퍼 날라야 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바가지를 들고 와서 도왔다. 어떤 여름에는 시골집에 휴가를 갔었는데, 우리가 없는 사이 온 집안이 물에 잠겼다. 다행히 이웃들이 우리를 대신해 집에 들어와 물을 퍼내 주었다. 이웃의 정을 느낄 수 있었으니 그나마 나쁘지 않은 우당탕탕 추억쯤으로 남겨둔 일이다.
반지하에 사는 일은 침수 외에도 힘든 일이 많았다. 집의 연차가 쌓여갈수록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다. 화장실 하수구를 타고 쥐가 집 안으로 들어오곤 했다. 시꺼먼 쥐가 화장실부터 거실, 안방까지 순식간에 내달리다 다시 하수구 속으로 들어갔다. 바퀴벌레도 쉽게 생겼다. 생각해 보니 참 열악했다. 집 밖에서 우리 집을 들여다보기도 쉬웠다. 어린 나의 친구들은 바닥 아래에 있는 창을 통해 '놀자!'라고 외쳤고, 엄마는 그런 친구들에게 유독 화를 냈었다. 빚쟁이 같은 사람들이 우리 집 창을 두드리며 '집에 있는 거 다 안다'라고 소리치는 날도 있었다. 우리 가족은 불을 다 끄고 아무도 없는 척 숨을 죽여야 했다. 엄마는 새 학년이 될 때마다 학교에 낼 문서에 우리 집 주소를 B02호가 아닌 102호라고 적으라고 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반지하에 사는 건 부끄러운 거구나 체득했다.
그렇게 반지하의 삶이 처참했지만 그나마 나았다고 할 수도 있다. 어쨌든 우리 집이었으니까. 몇 년 후 그 집은 경매에 넘어갔다. 우리는 이사를 가야 했다. 월세집을 전전했다. 그 월세집은 반지하일 때가 많았다. 왜냐하면 제일 싸니까. 바쁜 아빠 없이 엄마 홀로 집을 구한 적이 있었다. 그 집은 역시 반지하였다. 아빠는 천둥같이 화를 냈다. 왜 또 이런 집을 구했냐고. 하지만 그 답은 가장인 아빠가 가장 잘 알았을 것이다.
나는 대학에 가며 학교 앞에 하숙 방을 구했다. 본가의 월세를 내기도 형편이 빠듯했지만 나는 억지를 부렸다. 용돈은 과외해서 벌 테니 하숙비만 좀 보태달라고 부모님을 졸랐다.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 가능한 하숙비 예산을 되새기며 방을 보러 다녔다. 그리고 나는 또 반지하 방을 구했다.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나의 예산 안에서 가능한 건 겨우 거기였다. 첫 독립생활은 대체로 좋았다. 막차 시간 걱정 없이 밤새 친구들과 술을 마실 수 있었다. 친한 친구는 물론 남자친구도 데려와서 놀 수 있었다. 햇빛이 전혀 들지 않았지만 자유로웠다. 먼지가 가득했지만 행복했다. 그리고 나는 그 방에서 자주 아팠다.
나는 다행히 대기업에 취업했다. 열심히 돈을 모아 학자금 대출을 갚을 수 있었다. 보증금도 마련했다. 반지하와 원룸을 전전하던 가족들을 방 2개짜리 대단지 아파트로 이사시켰다. 물론 월세였지만 보증금 2천짜리 월세집이었다. 엘리베이터도 있었고, 분리수거 요일도 정해져 있었고, 주차장도 있었다. 해가 무척 잘 드는 11층이었다. 엄마는 무척 기뻐했다. 엄마가 좋아하는 화분들도 아주 잘 자랐다.
나는 성실한 남자와 결혼했다. 양가의 지원은 없었지만 둘이 모은 돈으로 전셋집을 구했다. 2년 뒤, 서울 아파트 값은 오늘이 제일 싸다는 선배들의 말에 마음이 급해졌다. 서울 곳곳을 둘러보았다. 마음에 드는 대단지 아파트가 보였다. 내가 그토록 원하던 서울! 대단지! 아파트! 하지만 그 아파트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집은 1층뿐이었다. 사람들이 꺼려해서 조금 더 싼, 1층 말이다. 흔히 말하는 로열층은 우리의 대출 한도를 벗어났다.
나에게 허락된 건 늘 반지하였다. 그리고 지금 나는 1층에 살고 있다. 반지하에서 반층 올라왔다. 내 삶이 꼭 그렇다고 느껴진다. 1층으로 올라선 삶. '뿌듯해도 된다' 스스로 그렇게 되뇌었다. 1층에서의 삶은 생각보다 좋았다. 두고 온 물건을 가지러 돌아갈 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그토록 귀찮아하던 분리수거도 덜 귀찮아졌다. 숲세권에 살지 않지만 창밖의 나무를 통해 사계절을 느낄 수 있다. 가끔 새가 날아와 지저귄다. 홈트의 시대에 층간 소음 걱정 없이 열심히 쿵쾅댈 수 있다. 미래에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에게 '뛰지 마'라고 소리치지 않아도 되겠지. 드디어 1층에 살게 된 나는 마음껏 이곳에서의 삶을 살아보려 한다. 나에게 허락된 1층의 삶에 감사하며. 폭우로 침수됐던 어떤 날의 반지하의 삶을 추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