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브리그 이동기 하편
이 이야기는 박씨이동기 상편에서 이어진다. 박씨는 이동을 결정했고, 그렇게 되었다. 이 글은 2021년 겨울에 이동을 확정짓고 쓴 글이다.
겨울을 뜨겁고 혼란스럽게 달군 스토브리그가 마무리 되었다. 내년에는 새로운 조직으로 이동해서 새로운 일을 하게 되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고, 자주 겪지 못할 일이기에 기록의 가치가 있다.
올해의 이동에 대하여 의미부여를 좀 하자면 직업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연차(나이)가 되었다는 것, 한 조직에서의 6년은 '가만히 있기에도 이유가 필요한' 연차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동료들이 (10년차 미만의) 이동 제의를 받는 것을 보면 이 조직에도 인력 Shortage가 있음을 절감했다. '좋은 사람은 어디에서든 원하고, 특정한 나이대의 좋은 사람은 더 귀하다.'
이동 과정에서 남길 만한 메시지는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평판에 대한 것, 둘은 일을 선택하는 것의 의미, 셋은 확장성과 Anchor에 대한 것이다.
2018~2019 시즌의 나는 굉장히 거칠었다. 근무지가 먼 곳으로 원치 않는 이동을 겪어야 했고, 잘 맞지 않는 팀장과의 잦은 불화가 있었으며, 임원은 불투명한 오더로 괴롭힌다고 생각했다. 세상의 여러가지가 내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여겼으며 마음도 그다지 건강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Closed society에 퍼지는 평판은 독이었다. 그 시절의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일은 일 대로 하기는 하는데, 엄청 툴툴거리면서 (결국 할 거면서) 하기 싫은 일 안 하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날은 서 있으나, 이 칼을 잡으면 내 손이 다칠 것 같은 칼.
회사를 완전히 옮기는 상황이라면 Reference Check이라도 명확하게 할텐데, 인접한 조직에서의 이동이라 그렇지 않았다. 이동할 조직에 '겪어본 사람'이 많다 보니 2018~19시즌의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그렇게 여길 것이다. 평판에서 혼선이 왔다. 이동할 조직에서는 혼란스러웠겠지. 그로 인해 적극적으로 '얩니다!'라고 하지 못했다는 썰이 있다.
데이터가 남아있지 않는 한, 사람들은 특정 시기의 나를 '인상'으로 기억한다. 인상을 주는 것은 일을 하던 동료들과 순간에 일어난 일이지만, 나중에 나에 대해 누가 묻거든 그때 내가 했던 일(객관적 사실)보다는 그때의 '인상'으로 기억할 것이다. 평판 측면에서는 나는 그때의 액션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번 이동은 커리어에서 수많은 선택받은 (혹은 고를 여지가 없었던) 상황보다는 적극적으로 결정한 사건이기에 기념비가 된다.
한 직장에서 오랫동안 일하다 보니, 잊고 있었던 게 '선택'이다. 맨 처음 입사지원서를 내기로 선택한 이래로, 커리어에서 더 자주, 많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선택받는 일'이다. 특히나 지금 회사처럼 매우 안정적이고 좋은 처우를 제시하는 상황에서는, Dynamic Growth를 굳이 취하지 않아도 된다. 커리어는 Cash cow가 되고 내가 굴리는 자산으로 Star를 발굴하면 된다.
잠깐 BCG 매트릭스 개념을 빌려온다.
지난 6년을 돌아보면 1~2년은 Cash Cow가 Star라고 생각했던 시기다. 3~4년은 지독한 방황기였다. 이 회사의 커리어(Cash cow)를 어디 다른데 좋은데 없나(Star)? 로 기웃거리는 이직 미수범 신세였다. 5~6년은 '커리어는 어디서 뭘 하든 캐시카우고, 자산군 관리를 잘 해야지'로 요약될 수 있다.
6년차를 마치는 시기에서는, Cash cow도 이대로 가면 어디에도 팔리지 않는 상품이 되겠다는 위기가 있었다. (이동의 결정은 단순히 조직장이 바뀌어서가 아니었다.) 6년차의 재정 목표가 있었고, 여러가지 운이 겹쳐고, 재무목표는 달성된 상태여서 이직 제의에 보다 열린 마음으로 생각해볼 수 있었다.
여전히 내 주변의 동료들은 출중했고, 보상도 훌륭했으며, 하는 일도 나쁘진 않았다. 일이 익었으니, 좀 더 한량스럽게 일할 수 있었다. 연말 임원인사 이후, 처해있는 상황이 바뀔 위기에 놓였다. 남느냐, 가느냐는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제안되었고, 이동에 대한 선택은 전적으로 내 몫이 되었다. 남기로 선택했다면 남았겠지만, (새로운 회사로 가지 않으면서) 내가 해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일이어서 다행이었고, 이동을 결정했다.
엄밀히 말하면 커리어 전환은 아니다. 인접 영역으로의 확장이고, 원치 않는 이동으로 인해 꺾어야 했던 커리어패스를 다시 On track으로 돌리는 일이다.
'교육쟁이'기는 한데 사람들 대하는 일 보다는 뒷방에서 데이터나 보면서 낄낄거리고 머리싸매고 고민하는 게 더 흥미로웠다. 선배들은 이런 걸 알아봤는지, '너 공부 더 해라'고 주문했고, 평균적인 수준보다는 조금 더 직무에 진심이었으니.. 잡식성 공부를 했다.
데이터 일은 언젠가 다시 해보고 싶은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질문을 하고, 어떤 데이터로 볼 것이냐?" 가 될 것이지, 테이터를 기가막히게 가공해서 내놓는 게 아니다. 시스템 부서에 간다고 해서 갑자기 해오던 일을 부정하고 'Data Guy'로 타이틀을 바꿀 수는 없다. 여전히 나의 Anchor는 People(HR)일 것이다.
회사 일은 그대로 지켜지기보다는 말바꾸기가 빈번한 운명을 타고났기에, 생각하는 방향의 일을 하지 않게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일은 일대로 하면서, 사이드 프로젝트로 착실히 하고 싶은 일 하면 된다. 시스템과 데이터는 가까이에 있으므로, "너네가 시킨 거 말고 이것도 파 봤는데..그렇더라구.." 주제로 연에 한두번정도 던져주면 원하는 일의 방향으로 돌리는 시도는 가능하다. 기존 조직에서 비슷한 일을 변주하는 것보다 확장성 있는 일을 하게 된 점에서 기대가 있고, 초기에 어려움은 있겠지만, 못할 거 같지는 않다.
불확실성은 큰 스트레스를 준다. 선택하였으나 그대로 되지 않았을 때의 좌절 내지는 실망감, 내가 결정할 수 없고 불투명한 프로세스, 하마평, 커리어 방향성에 대한 고민까지 어우러져 불안과 스트레스의 잡탕이 된다.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나, 영향을 크게 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점은 꽤 답답하고 짜증스러운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되어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회사 옮길 정도의 스트레스였다. '회사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가장 안좋은 일이 퇴사밖에 더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던 건, 사실은 퇴사 걸고 내년을 바라보았던 것 같기도 하다.
이동의 시작이 되었던 계기나, 과정에서 전해들은 이야기를 종합하면, 조직 내 이동은 평판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로 돌아간다. 평판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일은 결국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나는 '특정 시점에 그들과 함께 일했던 나'로 기억된다. 그런데, 한 사람은 꽤나 조밀하게 바뀔 수 있고, 더 좋아질 수도 있고 나빠질 수 있다. 누적되는 Data라서 본인이 가장 잘 안다. 결국 겪어봐야 아는 게 사람이다.
가장 쉽게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직접 어떤 사람인지 보는 (경력직 면접과 비슷한) 과정이다. 그런데 그 일을 하지 않았으니, 중간에 껴서 들들 볶이는 과정이 가장 유쾌하지 못했다.
돌고 돌아 '아는 사람들'과 다시 일하게 되었다. 내가 시간이 지나서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면, 더 나은 버전으로 보여주면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