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배운 것과는 좀 다르군요
평가면담은 없지만, 어디서 좋은 문물을 접하여 왔기에 박수필 조직은 임원과 일대일 면담을 주기적으로 한다. 올해는 이동 첫 해여서 애로사항이 많은데, 들어가기 전에 나름의 작전계획을 세웠다. 배경에는, 일대 일 면담을 진행한다고 하여도 바뀔 일은 없다는 굳은 신뢰가 있다. (혹은 트랙 레코드가 증명한다). 이런 유형의 형식적 면담이라면 집중을 끌 만한 여지를 최소화해서 빨리 끝내야 퇴근을 제 때 할 수 있다.
작전 계획이란 예를 들면 아래와 같다.
과음으로 몸이 안 좋아지는 이야기는 해야겠군, 이 일에서 보람찬 지점을 찾아서 얘기해 줘야겠군, 내가 이 면담을 통해 잃을 것은 없게 해야겠군,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 있지만, 그런 일의 성격은 이양반이 안다고 바뀌거나 나아질 것이 아니니 말아야겠군, 뒷다리 잡는 일이 될 말은 하지 말아야겠군 등이 있다.
그럼에도 박수필은 20분이면 끝날 면담을 40분을 채웠다. 작전 대 실패다. 허나, 소기의 성과는 있었는데 아래와 같다.
계획대로 건강 이상의 사실을 밝힘, 일의 보람찬 지점의 어필에 성공하였으며 나에 대한 그의 오해를 정정하거나 나에 대해 갖던 생각을 입증해 줌, 그가 나에게 하는 기대를 들을 수 있었음.
면담을 마친 임원에게도 뿌듯함을 선사한 것도 성과라 할 수 있다. 그는 아마도 두 가지 사실에 뿌듯함을 느꼈을 것인데, 하나는 면담을 하였다는 사실 그 자체, 다른 하나는 본인의 유능감의 확인이다. (“박수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사는 군. 내가 또 후배를 하나 키워냈군. 뿌듯하도다.”) 면담 결과의 이행 여부와는 무관하게 성공적인 면담으로 기록할 것이다.
허나 박수필의 기분은 정 반대 측면인데, 이양반은 나에게 비전을 보여주지는 못했고, 그중 절반은 본인 이야기로 채워졌다. 박수필이 설명한 것 이상의 디테일을 알지 못했고 ( = 즉 박수필이 무엇을 하든 큰 관심이 없어보였고) 조언은 즉 하나마나 했다.
그래도 사십분이나 근무시간을 할애 했는데, 박수필도 뭔가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싶어서 교훈을 정리해 본다.
1. 좋은 면담이라는 것은 어렵다. 연습이 필요하다. 어딘가에서 배우기로는, 일단 듣고, 하고자 하는 것을 들었을 때, 그러면 내가 무엇을 해 줄까? 등을 묻는다고 한다.
2. 앞으로 한 두 분기 엇박자를 내지 않으려면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지는 최소 알았다. 그의 조언대로 내가 하고 싶은 마음은 딱히 없다. 그의 기대대로 움직이지도 않을 것 같다. 대신 큰 틀에서 본인이 박수필을 어떻게 생각하는 지에 대한 힌트가 되었다.
3. 박수필의 앞날을 걱정해 주었지만, 큰 비전을 제안해 준 바 없는 만큼, 박수필은 자기 하던 대로, 혹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 즉, 그의 커리어 비전에 대한 제안은 나의 프레임 바깥에 있지는 않았다.
4. 그래도 내가 그에게 존중할 만한 점을 발견한다면, 현 상황을 기준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했다는 것이다. 시계열은 나보다 좀 더 넓었지만, 가정들 (박수필이 딴생각 없이 회사를 계속 다닌다던지, 누군가 이 조직에 새로 온다던지)은 썩 동의하긴 어려웠다.
결과적으론 박수필 좋은 일 한 면담이었다. 아, 그럼 윈윈인가 박수필의 하반기에 영향을 줄 수 있고, 언젠가는 다시 면담을 하는 날이 올 지도 모르니, 그 기록차원에서 남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