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끝나고 출시된 나의 물방울 스티커
여름 내내 내리던 비가 그치고 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선선한 공기, 살랑거리는 바람, 따사로운 햇살.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가을이다.
지난 여름, 나는 비가 하도 많이 와서 물방울의 정령이라는 스티커를 만들었다. 그리고 제작이 밀리고 밀려 9월에 제작이 완료되었는데 장마가 끝나버렸다. 중부지역 기준 무려 54일이라는 최장 장마 기간이 있었음에도 제작 타이밍을 놓쳤다. 하필 맑은 날 찍은 스티커는 왜 이리 예쁘게 나온 건지. 스스로 컨텐츠 제작자라고 생각하는 나는 이런 타이밍을 놓친 것이 그저 아쉽다.
취미 생활로 문구를 만들게 된 건 사연이 좀 길다. 2014년 취준 생활에 지쳐있을 때쯤 동생이 던진 말 한마디에 내가 직접 쓴 손글씨로 스티커를 제작하기 시작한 것이 시초였다. 그 이후론 취미 삼아 하던 일인데 덕질에도 유용하게 써먹었고, 주위에서도 알아주는 분들이 있어 꽤 다양한 작업을 하곤 했다.
그리고 첫 회사를 퇴사한 후, ‘본격적으로 해볼까.’ 싶어 캘리그라피 외에도 표정 스티커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문구를 제작했다. 유행에 따라 B5 노트패드를 만들어보기도 했고 마스킹테이프도 만들어봤다. 유행에 따라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트렌드 조사가 필요했고 그만큼 재고가 생긴다는 부담감이 있었다. 게다가 ‘내가 쓰고 싶은 문구를 만듭니다.’라는 내 취미 생활의 신조와도 맞지 않았다.
그럼에도 결혼 준비를 하는 동안도 짬짬이 제작을 하곤 했다. 결혼하고 오프라인 더 열심히 해야지 생각했는데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처럼 오프라인 마켓에 불붙었을 때 자주 도전할 걸 그랬다. 이런 상황이 올지도 몰랐을뿐더러 오히려 결혼 준비를 이유로 약 6개월 정도 제작을 쉬었는데 그 시간에 내 취미에 다해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던 것이다. 어쩌면 나에게 부담이 되는 취미 생활이 아닐까. 하면서 많은 고민 속에 갑자기 불타오른 제작 욕구로 심기일전하고 다시 시작했지만, 이번에 타이밍을 놓쳐버린 나의 제품.
컨텐츠 제작자라고 표현한 건 문구 시장을 쓰윽 훑어만 봐도 모두가 컨텐츠 제작자이기 때문이다. 이런 제품이? 할 정도로 다양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고 기획부터 제작이라는 과정을 통해 실물 제품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즌마다 나오는 시즌 제품도 아주 부지런하게 준비하는 작가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다이어리 꾸미기(다꾸)에서 멈추지 않고 스티커 배경지를 이용해 스티커 꾸미기 (스꾸) 폴라로이드 사진이나 포토카드를 꾸미는 폴라로이드 꾸미기(폴꾸), 포토카드 꾸미기(포꾸) 등으로 발전하니 그에 알맞은 문구를 제작하는 것도 트렌드를 읽는 컨텐츠 제작자라는 표현이 맞다.
게다가 나는 지금 회사로 이직하며 컨텐츠 제작자로 직무를 정했지만 아무도 그 직무를 챙겨주지 않았다. 아무도 몰랐겠지만 스스로 이 직무를 지키기 위해 발버둥을 참 많이 쳤다. 하지만 같이 일하던 디자이너의 희망 퇴사로 그 욕구마저 버려졌다. 그래서 스스로 할 수 있는 문구 제작이라는 내 취미 생활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다음 직무도 컨텐츠로 갈 생각이라 이 회사에서 쌓는 직무 외 나만의 컨텐츠 기획/제작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으니.
‘다음번 제작은 타이밍을 놓치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하며 출근하는 오늘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