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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 Jan 19. 2019

빛나는 산마르코 광장을 기억해줘

베네치아에서 만난 감동

비가 내려서 물이 가득찬 광장에
쏟아지는 불빛을 보면
비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어

난생 처음 떠나는 혼자 여행이었다.

그리고 처음 가보는 유럽 여행이었다.


하지만 여행을 떠나기 하루 전까지도 아팠다. 하필 날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 해 9월이 시작되는 날부터 응급실에 5번을 실려갔다. 정확한 병명은 만성식도염과 위염 그리고 바이러스 장염이었다. 모든 염증을 다 안고 응급실 출퇴근 도장을 찍으며 안 그래도 없는 연차를 모두 병가로 사용했다.


무려 6개월 전부터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했던 여행이었다. 그치만 아픈 나를 걱정한 가족과 회사사람들은 내가 알아서 여행을 취소하길 바랐던 모양이다. 급기야 나는 죽더라도 이탈리아에서 죽겠다고 했다. 다들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이 여행이 뭐라고 이탈리아에서 죽겠다고 했을까 싶고 ㅋㅋㅋㅋㅋ아무리 생각해봐도 웃기다.


근데 참 이상하지, 갔다오고 나서 매일 이 여행을 곱씹는 걸 보면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없어선 안될 시간이었나봐.

산타루치아역에 가는 길은 생각보다 험난했다

그렇게 도착한 이탈리아 베네치아,

도착한 날은 비냄새가 나는 듯했다.


울퉁불퉁한 돌길을 따라 28인치 노란색 캐리어를 낑낑거리며 끌고 산마르코 광장 근처에 위치한 숙소를 찾았다. 오는 길이 나름대로 험난했어서 엄청 맛있는 파스타를 먹고 싶어 사장님께 레스토랑도 추천을 받았다. 자리세를 내면 팁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기본 상식도 모르고 자리세에 팁까지 두둑히 두고 나왔다. 그렇게 식당을 나와 산책을 하다보니 연인들이 저마다의 로맨스 영화를 찍고 있었다. 그 거리에서 나 혼자만 이방인 같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내가 지금 여기 베네치아에서, 이 밤을 보내고 있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으니까.


이튿 날은 잠시 비가 그치는가 했다가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쉽게 그칠 비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말 그대로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잠깐 그친 비구름 사이로 무지개가 나타났다

원래 나는 비에 발이 축축하게 젖는 것을 혐오해서 비가 오면 학교도 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랬던 나는 온데간데 없고 발이 젖든 옷이 젖든 상관하지 않고 하루 종일 베네치아의 골목길을 걸어다녔다. 비가 오는 것쯤은 상관 없었다. 내가 지금 베네치아에서 비를 맞고 미로같은 골목길을 거닐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으니까.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행복했다.


밤에 살짝 비가 그친 틈을 타 동행들과 곤돌라를 탔다. 기막힌 타이밍으로 곤돌라에서 내리자마자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라이브 공연이 한창이었던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일찍 숙소에 들어와 쉬던 중, 방문이 열렸다.


우리 지금 밖에서 술 마실 건데
같이 갈래요?


그렇다. 나는 이탈리아를 가기 전 위염과 식도염으로 응급실을 들락날락하고 병가를 일주일이나 썼던 “환자”였다. 근데 무슨 용기였을까?


술 안마셔도 따라가면 안 돼요?


그렇게 잠옷 차림으로 오늘 처음보는 룸메이트들과 함께 산마르코 광장에 자리를 깔았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또 다시 비가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자연스럽게 후드를 쓰고 술을 마셨다. 그러다 무심코 뒤를 돌아봤는데 상상도 못한 풍경을 마주쳤다.

베네치아는 갯벌 위에 지어진 도시. 비가 오면 물의 수위가 높아져 섬 곳곳이 홍수난 듯 물이 차오른다. (실제로 홍수가 나면 배를 타고 골목을 다니기도 한단다) 산마르코 광장 한 가운데부터 물에 잠겨 아름다운 광경을 뽐내고 있었다. 어떻게 찍어도 눈에 비치는 것만큼 예쁘지 않아 아쉬웠던 산마르코 광장의 비오는 야경. 내 평생 이렇게 아름다운 야경이 몇 번이나 있을까? 아직도 내 인생 야경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감동.

우리는 이 아름다운 풍경을 앞두고 비가 그칠 때까지만 마시자며 두칼레 궁전 앞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비는 그치지 않았고 결국 도망치듯 집으로 뛰어갔던 꿈만 같은 밤.

그 날 이후로 나는 여행에서 야경을 빼놓을 수 없었다. 물론 치안이 안좋을 수 있으니 최대한 조심히 다니면서도 그 도시의 밤이 담고 있는 감동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무심코 돌아본 곳에서 느낀 감동은 몇 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고, 그 날 이후 나는 비오는 날을 좋아하게 되었다.


후드로 떨어지는 빗방울의 소리와 느낌, 광장에 차오른 빗물에 비쳐 일렁이는 조명, 그리고 비릿하지만 차가운 비냄새까지. 나에게 베네치아는 말 그대로 물의 도시였고, 잊을 수 없는 비의 도시로 남아있다. 다시 베네치아에 간다해도 그 때의 감동을 다시 느끼진 못할 것 같아 조금 아쉬울 정도.

비가 그치고 보이는 산마르코광장 맞은 편 종탑

신기하게도 그 다음 날부터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마치 어제 다 쏟아냈다! 라고 외치는 것처럼. 그제서야 구름에 갇혀있던 아름다운 베네치아를 마주할 수 있었다.


베네치아는 언제나 아름다웠다.

비가 오지 않는 날도, 비가 내리던 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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