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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 Sep 15. 2018

모녀 그리고 모녀

동유럽 여행 곳곳에 남아있는 사람

엄마, 덕후인 거 같아

지난 7월, 엄마와 동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자유여행은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엄마가 가고 싶은 스팟을 잘 골라서 모아놓은 패키지 여행을 선택했다. 오랜만에 패키지 여행을 갔던 나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깨달았다. 우리의 7박 9일은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라는 걸. 그 중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훤칠한 키에 금발 머리의 여자분! 그리고 그 분은 손에 누군가의 얼굴이 박힌 부채를 들고 있었지.

아쉽게도 이번 여행에서 나는 내가 덕후다! 라고 보일 만한 아이템이 단 하나도 없었다. 인형을 챙기려고 했는데 컵라면에 밀려 빠졌고, 부채를 챙기려고 했는데 가방에 없었다. 책상 위에 고이 모셔두고 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갑도 다른 걸 가져와 그 흔한 포토카드 한 장도 없었다. 터덜터덜.


그래서 나만 그 친구가 덕후인 걸 알아차렸다. 그 친구는 내가 덕후인 줄 몰랐을 거고. 엄마도 “쟤 너랑 비슷한 부채 들고 있어”라고 했다. 응 엄마, 난 저거 책상 위에 고이 모셔두고 왔어. (광광)(오열)

우리는 동유럽을 7박 9일동안 여행했다. 정말 눈코뜰새 없이 바빴다. 버스를 타면 아까 분명 오스트리아였는데 벌써 슬로베니아라구요? 내려서 호다닥 보고 밥먹고 다시 버스타고의 반복. 크로아티아에서 두브로브니크 안가요? 비엔나에서 음악회는요?


오랜만에 하는 패키지 여행은 여행보단 스팟 찍기에 바빴고 나도, 엄마도 더 머무를 수 없다는 것에 속상해하며 아쉽지만 그렇게나마 우리의 두 눈에 두 귀에 동유럽을 담아보려 노력했다.

사실 이번 동유럽 여행은 나의 여행이 아니라 엄마의 여행이었다. 시작도 엄마로부터 시작되었고, 엄마를 위해 나는 보호자 역할을 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통역하랴, 환전하기 애매한 곳은 내 카드로 긁으랴, 택스리펀 알아보랴, 룸 와이파이 알아보랴, 이것 저것 챙길 것도 많고 매일 호텔을 옮겨야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덕질.. 하던 차에 여행 마지막 날 저녁, 프라하 한식당에서 띠링 울린 알람. 내 최애가 라이브 방송을 켰네? 소리는 못 듣고 화면이라도 보겠다며 켜두고 저녁 식사를 했다. 그게 아마도 일코해제 모먼트가 아니었을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 날 밤은 마지막 날이라 프라하에서 야경 투어가 있는 날이었고 우리는 저녁을 먹고 구시가지 광장에서 엄마와 맥주를 먹으며 자유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엄마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누가 저 멀리서 저기요!!!!!! 라고 외쳤다. 이 외국 땅에서 나를 저기요라고 부를 사람은 우리 일행 중 한 명이었는데, 그 금발머리 소녀였다.


일정 중 우리 모녀와 가장 많이 식사 테이블을 공유했고, 그러다보니 나이도 알게 됐는데 내 동생보다도 어린 친구였다. 예쁘장한 외모만큼이나 말도 예쁘게 하는 모습이 맨날 짜증내는 나와는 비교되서 엄마한테 “말도 참 예쁘게 하더라”했던 친구. 알고보니 내 가수랑 그 친구 가수가 같은 행사에 나오는데 하필 그 날이 티켓팅 날이었던 것! 혹시 가시냐고 물어보는데 아니요..! 라고 대답하면서도 내가 덕후인 걸 어떻게 알았지? 라며 아리송하게 생각했다. 아마도 브이앱을 본 게 아닐까 싶지만. (여전히 아직도 이게 맞나 싶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랑 처음으로 단 둘이 하는 여행에서 짜증만 내던 초반과 달리, 그 친구가 엄마에게 하는 걸 보며 나도 엄마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려고 노력한 것 같다. 그 모녀는 우리보다 젊을 때 여행하지만, 나는 지금이라도 와서 참 다행이라 생각하기도 했고. 뒤에서 볼 때 엄마 손을 꼭 잡고 엄마 배낭을 매고 다니면서 해맑게 웃는 그 친구의 모습이 내 동유럽 여행 추억 곳곳에 남아있다.


이 글을 읽을진 모르겠지만, 덕분에 저도 엄마랑 손 잡고 동유럽 여행을 마무리했어요. 참 많이 고마웠다고 전하고 싶은데 이름도 번호도 모른다는 것이 함정. 엄마들은 머리 크면 달라질 거라고 했지만, 왠지 안 변할 것 같은 착한 친구, 복 많이 받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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