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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 Jun 24. 2019

강요할 수 있는 건 없다.

각자의 덕질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근데 내 자식이라고 생각하면
나는 용납하기 좀 어려울 것 같아

우리 팀은 각자의 개성이 뚜렷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팀장님, 디자이너님 두 분, 그리고 나까지 어떤 것에 빠져본 적이 있는 덕후였거나 현재 진행형인 사람들. 그 날은 자취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는데, 운동화를 전문가급으로 덕질하는 디자이너님의 어머님이 집에 오셔서 수많은 운동화 박스를 본 반응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팀장님이 내 자녀가 그러면 수용해주기 어려울 것 같다는 말씀을 꺼내셨다. 그러자 우리 셋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한 말.


팀장님 취향 존중해주셔야죠, 취존!


이렇게 말했지만 사실 우리 팀장님은 자기 입으로 소문난 덕후였단다. CLUB HOT였다는 팀장님은 덕질이라는 주제만 나오면 입이 마르도록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을 설명하실 정도로 왕년의 한 가락 하셨던 덕후였던 것. 생각해보면 아버님께서 중간에 지원해주신 이후로 덕질 때문에 부모님과의 트러블도 줄어들었고, 부모님이 나를 믿어주고 인정해준다는 기분이 들었다고 자신의 말을 취소! 한다 하셨지.

포스터 받으려고 롯데리아 먹으러 택시타고 간 애..ㅎ

그럼 나의 덕질도 빼놓을 수 없지. 나의 덕질은 중학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에 신화를 좋아해 이 세상 모든 주황색은 다 모아서 주황공주가 되고 싶었던 거 같다. 그리고 고등학생이 돼서는 친한 친구가 빠진 슈퍼주니어에 같이 빠져 난생처음 팬클럽이라는 것에 가입해보기도 했다. (키트는 부모님께 걸리면 혼날까 봐 친구 집으로 같이 배송했는데 아마 버렸을 것..) 그리고 한참 덕질이라는 것에 흥미를 잃었다가 취업 준비를 시작하며 엑소라는 그룹에 빠져 밤새 사진을 저장하고 영상을 봤더랬다. 그리고 내 인생 첫 번째 콘서트 티켓팅을 하겠다고 피시방엘 갔는데 내 앞에 학생들은 성공하고 나는 혼자 실패해서 울면서 집에 갔었지. 그렇게 엑소 덕질이 내 인생 마지막일 줄 알았는데 국민 프로듀서가 되어 현망진창이 되다니, 누가 생각이나 했겠냐구. (현망진창 = 현생이 엉망진창이 되다)

올콘 필수!

덕질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뭐니 뭐니 해도 우리 부모님이 나의 덕질을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는 게 포인트인 것 같다. 어렸을 때는 인터넷이 없었다 보니 좋아하는 가수의 소식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이 직접 쫓아다니는 것 말고는 없었는데 그것마저도 학생이 하기엔 금전적/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나는 그만큼 대담한 아이도 아니었다. 그래도 TV에 신화가 나오면 엄마는 날 부르기 바빴고, 나 역시 오빠들 나오는 방송은 꼭 봐야 한다고 명절에 방송 스케줄표를 쥐고 있어도 잔소리는 하셨지만 실제로 금지하시진  않으셨다. 사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인 게 나는 실제로 행사에서 보고 온 방송을 나중에 티비에서 하고 있으면 “이거 보고 왔냐?” 하실 정도로 이제는 덕후의 부모님으로 일취월장하셨달까.

우리의 미친 소비...ㅎ

나이 먹고도 이렇게까지 덕질할 줄 몰랐다는 건 엄마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지만 그것마저 막으면 너의 숨통을 막는 게 될까 봐 그냥 두고 봤다는 것이 엄마의 속마음이었다. 이후에도 각자의 사연이 있겠거니, 하고 속은 타들어가도 별말씀 못하셨단다. 이제는 남편 될 사람도 있는데 자제하지 그래?라고 가끔 운을 띄우시지만 어쩌지, 내 남편 될 사람도 무언가의 덕후인 걸.

지하철 광고 찾아다니는 재미가 쏠쏠했지

난 덕질하며 가장 신기했던 게 엄마랑 자녀가 같이 덕질을 하는 모습이었다. 신기하기보단 부러움 반, 놀라움 반이었달까. 오프라인 행사를 뛰다 보면 딸애 손을 잡고 같이 슬로건을 흔들고, 나와 딸의 최애가 다르다는 어머님들도 보이고, 혼자 덕질하시는 나이 드신 분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물론 덕질에 나이 제한이 어디 있겠냐만은 부모님에게 빠순이 짓 좀 그만하라고 들었던 사람이라면 조금 문화충격일 수도 있고, 한편으론 꽤나 부러운 장면일 듯하다. 나 역시 내 자녀가 덕질을 한다면 불법적인 것이 없는 한 서포트해주고 싶으니까. 이 모든 건 덕후이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 무언가에 미쳐본 적이 없으면 누군가의 취향을 존중해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안다. 그리고 내 취향을 존중받는 기분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에 대해서도 아주 잘 안다. 그래서 부모라는 이름으로 취향에 대해 강요할 순 없다. 물론 금전적으로 서포트하는 거라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저 앞에 여자가 저에요,, 네 그래요,,

그래서 말인데, 부모라고 해도 내 취향을 존중받고 싶다면 자녀의 취향은 존중해줘야 합니다. 암요.

+ 덧붙이자면 우리 엄마는 그릇 덕후다. 집에 어마어마한 그릇들이 있는 장식장만... 노코멘트하겠다. 껄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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