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리 Jan 05. 2020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결혼의 시작

1. 내가 결혼이라니

내가 결혼이라니.

언젠가부터 ‘난 결혼 안 할 거야. 나중에 비혼식하면 놀러 와!’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혼자 살아도 충분히 재밌고 남의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생활이 편하고 익숙해졌다. 게다가 그 무렵 나는 앞뒤 안 가리는 덕후, 덕질에 완전히 빠져있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내 덕질이 끝나지 않는 한 나에게 결혼은 앞으로도 먼 미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 내가 결혼이라는 걸 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그 상대를 궁금해했다. 상대는 아주 친한 대학 동기가 세 번이나 이어주려고 했던 동갑내기 친구. 자신의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이 사람은 나의 첫 혼자 여행에서 도움을 주었지만 얼굴은 몰랐고, 그다음엔 나의 소개팅을 도와주었고 (!) 그다음은 직접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겨울 대학 후배 둘이 오랜 연애를 마치고 결혼하던 날, 나는 1년 만에 소개팅을 하기로 결심했고 그런 나를 보며 다시 한번 자신의 친구를 들이민 내 동기. 그렇게 우리는 결국 만날 운명이었나 보다.


처음 만나기로 한 약속이 불발되고 다시 잡은 날도 하루 종일 연락 한 통이 없어 이 소개팅은 망했구나, 하고 포기할 뻔했는데 알고 보니 나보다 더 먼저 약속 장소에 와서 주위를 둘러보고 공부하며 기다리고 있던 사람. 나는 늦지도 않았는데 먼저 도착한 그를 보고 놀라서 저녁식사 맛이 어땠는지 우리가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커피를 앞에 두고 그는 자신의 동네가 편하고 좋다는 말과 함께 결혼해도 지금 동네에서 살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첫 만남에 결혼 얘기까지 하냐고 웃으며 나는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런 우리는 사귀기로 한지 30일 만에 결혼을 약속했고, 아쉽게도 그가 원하던 동네가 아닌 다른 동네에서 살게 될 예정이다.


갑자기 왜? 왜 결혼을 하겠다는 결심을 했어?

그 날은 생리통으로 아파서 허리를 부여잡고 일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너무 아파서 집에 가는 지하철에서 기절하겠군, 하던 내 앞에 2시간이나 걸려 나를 데리러 온 그가 있었다. 미안했지만 눈 꼭 감고 한 번만 신세 질게! 하고 차를 탔는데 꽉 막힌 퇴근길에서 혹시 내가 아플까 봐 손을 꼭 잡아주고 가끔 찡그리는 나를 보며 배에 따뜻하게 약손을 해주는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이유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30년 뒤에도 우린 이렇게 지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렸고 그 마음을 눈치챈 그는 며칠 뒤 프로포즈라는 것을 했다. 나에게 결혼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적절한 타이밍에 찾아온 기적 같은 일이었다. 핑크빛 꿈에 젖은 결혼 생활을 기대해서 시작된 게 아니라 소박하게 ‘이 사람과 30년 뒤에도 오손도손 살고 있을 것 같아서’.


첫 만남에서도 솔직한 그에게 호감이 생겼다. 두 번째 만남에선 나를 보고 어쩔 줄 모르는 그 모습에 설렜다. 세 번째는 이미 너의 얼굴에 ‘난 너를 너무 좋아해’라고 적혀있는데도 좋아한다 말하지 못하고 빙빙 돌리는 그에게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라며 고백을 재촉했다.


그와의 결혼을 결심한 이유, 만난 지 350일째 그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여전히 나에게 한결같고 우린 30년 뒤에도 이렇게 지낼 것 같다. 그러길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스스로가 싫어지는 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