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한 첫눈--
해마다 삭풍 몰아치면 어김 없이 오는 그대기에
당신과 한 몸 위해 한겹 두겹 내려 놓고 엿가락처럼 밤을 늘렸네.
변방에 떠 돈다는 소문에 곧 오겠지! 금방 오겠지!하며
대설까지 기다려도 소식 없어
긴 긴 동짓날 밤 함박눈처럼 펑펑 울었네.
정화된 마음으로 주섬 주섬 초록을 준비하던 날
장난처럼 그대 나타나, 행복으로 마음 다쳤네.
그렇게 마음에 행복의 멍이든 그날은 정기 등산날인 토요일이다. 메마른 어깨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느끼며 차에 올랐다. 얼마쯤 지났을까! 창밖에 눈이 오기 시작한다. 삼동을 기다리다 포기 했는데! 3월 중순이 넘어 눈이라니! 그러면서 얼마나 올까! 오다 말겠지! 하는 마음과 함께 산행 걱정도 했다. 가만히 보면 인간사 또한 애착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내려 놓는 순간 이루어 질 때도 있다.
망보천촌(望寶川村) 입구에서 하차 한 후 긴 도로를 걸으니 하얀 발자국이 그려 진다. 타이어 자국도 찍어 보고 스틱으로 짓궂은 선도 긋는다. 낮은 기압으로 인해 주변은 고요하고 눈은 발아래서 어스러진다. 그렇게 마을로 들어서니 여러 품종의 개들이 날뛴다. 뒷 다리를 다쳐 잡개 “가오”도 안 나오는 사자개, 언제나 최강인 똥개, 흰 눈 위에서 더욱 뽀대 나는 늘씬한 검둥이 등이 뛰어 다닌다. 역시 눈 오는 날에는 개가 있어야 한 풍경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견들이 아무리 짖어도 우리는 기차처럼 태연하게 마을을 벗어 났다.
밤나무 잎이 눈과 함께 쌓인 곳을 지나 이내 대흑산 산길로 든다. 꽤 넓은 흙 길을 따라 오르막에 이르니 언덕 위에 성황당이 있다. 그곳에는 백년 넘어 보이는 소나무가 넓게 가지를 뻗었다. 먼 옛날에는 짐 실은 나귀 한 마리와 주인 따르는 아들이 다 헤어진 무명옷을 입고 이곳을 지났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산우들이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입고 스틱을 짚으며 길게 줄을 이으니 이 또한 만건곤한 백설 속! 하나의 풍경이 아니겠는가. 능선을 오를수록 모자챙에는 눈이 쌓이고 건너편 산은 더욱 뿌옇다. 굳이 DSLR 카메라가 아니더라도 피사체는 선명하고 배경은 흐릿한 아웃포커스 사진이 저절로 만들어 지는 몽환 같은 경관이다.
소복이 내리는 눈이 만들어낸 경치를 보며 천천히 봉우리에 오르니 앞에는 정상을 향한 능선길이 흐릿하고, 낮은 곳에는 눈에 갇힌 풍경이 아련하게 펼쳐 진다. 가려는 길은 미끄럽고 안개는 짖어져 은산탑림을 향해 하산 했다. 다시 돌아온 망보천 골목에는 땔깜이 차곡차곡 쌓였고 담장 곁에는 설경에 겨운 아가씨 두 명이 스텝을 맞추며 늘씬한 다리를 흔든다. 집 앞에서 소일하는 노파는 바쁘지 않고 그 위로 겨울새 한 마리 외마디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동네를 벗어나니 서정 넘치는 곳이 나왔다. 눈 쌓인 길에는 드문 드문 소나무가 있고 옆으로는 조그마한 밭들이 농부의 마음처럼 정겹다. 또 다른 촌락과 이어진 길은 점점 좁아지며 아득히 고개를 넘는다. 때로는 가지런한 돌들이 이들을 부축하기도 하고 홀로선 나무들이 함께 하기도 한다. 멀리 우뚝한 전선철탑은 문명을 나르며 자연과 어우러진다. 그 위에는 둘 혹은 혼자인 산우들이 걷는다. 오래 전에도 정감 넘치는 이 길을 걷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다름아닌 언덕 너머 마을에 사는 초경이 비치는 소녀가 이 마을 청년을 사모하여 소나무 아래에서 추위를 녹이며 불 같은 사랑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후손은 행복한 현재를 산다. 이런 애틋한 러브스토리를 그리니 주변은 더욱 정겹고 길은 아쉬울 정도로 짧게 느껴진다.
잠시 후 고문님을 따라 산으로 들어 점심 자리를 펴니 가히 명당이다. 이를테면 좌측에는 소나무와 바위 산에 어우러진 은산탐림이 자리하고, 우측에는 측백,편백나무 울창한 숲이 능선 따라 가득하다. 그리고 위로는 정상을 향하는 산행로가 있고 아래에는 행복한 마을 망보천촌에 이르는 길이 열여 있다. 한마디로 좌청룡우백호,남주작북현무의 자리다. 우리도 이 명당에 맞게 좌측에는 초코바님이 오뎅탕을 우측에는 봉선생님이 매운 라면을 끓인다. 그리고 북쪽에는 현무를 대신해 자리한 고문님의 떡라면이 열기를 뿜는다. 남쪽으로는 눈 위에 갖가지 찬을 펼친 산우들이 길게 앉으니 명나라 열세황제가 누린 식사가 부럽지 않다.
점심 후에는 크고 멋들어진 탑 6-7개가 무리를 이룬 곳에서 잠시 등산은 잊었다. 그리고 관광객 같은 마음으로 화려하고 규칙 있는 탑들을 아래에서 위로 혹은 좌에서 우로 살피며 구경 했다. 정식 개방된 후 다시 찾으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종탑을 향한다. 40분정도 계단 길을 오르니 섬 같은 봉우리에 종을 달기 위한 정자가 있다. 오래된 것은 내리고 새로운 종을 달기 위해 올려 놓았다. 중요한 것은 이를 둘러싼 경치다. 철벽산이 운무 속을 넘나들며 2개 혹은 3개의 봉우리를 번갈아 보여 주고 좌측에는 갖가지 모양의 바위산이 있다. 아래에는 안개가 가득하고 위에는 정상 봉우리가 우뚝 하다. 마치 운무 속 정자를 중심으로 병풍을 친 것 같은 아름다운 경치를 해칠 까봐, 오늘은 종소리마저 내려 놓았다.
자연에 도치된 시간이 지나고 정상에 오르니 운무가 자욱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어느덧 눈은 그쳤고 우리도 하산을 시작했다. 구불구불한 길은 주의를 요한다. 바닥에는 바위와 돌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고 눈에 묻힌 가지는 죽은 것인지 산 건인지 잘 보고 잡아야 했다. 하지만 옆과 뒤에는 여전히 아름다운 설경이 숨어 있어 이러한 수고도 문제 되지 않는다. 그렇게 다시 망보천촌을 지나 귀가 버스에 오르니 피로 보다는 눈 속에서 산행한 멋진 시간이 더 크게 다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