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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작 Mar 05. 2018

어느 식탁에 수저를 올릴 것인가

밀정 (2016) 

아침 먹으러 가자


상해 시내의 여관 앞. 이른 새벽부터 이정출(송강호)을 불러낸 김우진(공유)이 아침식사를 하러 가자며 이정출을 차에 태웁니다. 무장독립운동 단체 의열단의 경성지부장이라는 정체를 감춘 채 고미술상 행세를 하고 있는 김우진의 조찬 초대가 뭔가 미심쩍긴 하지만 그렇다고 의심하긴 애매한 상황입니다. 어젯밤 정출을 여관까지 데려다준 우진이 '내일은 불란서 요리나 먹으러 가자'라고 말하기도 했었으니까요. 조선인 출신의 일본경찰로서 의열단의 뒤를 캐라는 특명을 받고 이중첩자 노릇을 하고 있는 이정출로서는 아침부터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김우진을 따라가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상해 프랑스 조계 지역의 미로 같은 골목을 성큼성큼 가로질러가는 김우진과 미심쩍어하면서도 그의 뒤를 묵묵히 따라갈 수밖에 없는 이정출. 그런데 김우진이 안내한 어느 주택의 부엌에 들어서는 순간, 풍겨오는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에 이정출은 자기도 모르게 경계심을 거둬버리고 맙니다. 


상해에서 먹는 된장찌개와 맛있는 생선구이에 아무런 의심 없이 허겁지겁 밥을 먹는 이정출. 그에게서 더 이상 경계나 의심의 눈초리를 찾아볼 수 없게 되자 김우진은 그를 여기 불러온 진짜 목적을 털어놓으려고 합니다. 그전에 먼저 '모가지를 내놓아야 하는 일'이라며 엄포를 놓는 김우진. 그의 말에 이정출은 '밥값으로 모가지를 내놓으라'는 거냐며 농담으로 되받아치지만 젓가락을 내려놓는 김우진의 진중한 표정을 보자 그의 말이 결코 농담이 아니란 걸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이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한 남자! 그가 '음식이 입에 맞냐'는 평범한 인사를 하는데도 이정출이 얼음처럼 굳어버리는 이유는 어둠 속에서 나타난 그 남자가 바로 의열단장 정채산(이병헌)이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이정출은 너무나 놀란 탓에 순간적으로 일본경찰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망각한 듯, 벌떡 일어나 정채산의 두 손을 잡고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고 맙니다. 


일본 경찰이 그토록 잡고 싶어 하는 의열단장 정채산과 한 식탁에 마주 앉을 수 있을 거라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정출은 잔뜩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이런 말도 안 되는 자리를 만든 김우진의 속셈을 아직 모르겠는 이정출은 그 진의를 파악하느라 계속 눈치를 살피는데요, 그와는 달리 정채산은 마주 앉은 손님이 일본 경무국 경부라는 것에 대한 경계심이라곤 전혀 없이 태연자약하기만 합니다. 그저 '만리타향'에서 만난 '동포들끼리 밥 한 끼'하는 자리라며 편안하게 이정출을 대하죠. 


영화 <밀정> 스틸컷


정채산이 귀한 손님에게 접대할 술을 가져오겠다며 잠시 방을 나가자 그제야 이정출은 김우진에게 정색을 합니다. 최고 현상금이 걸린 의열단장 정채산을 경무국 경부의 눈앞에 내놓는 데에는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을 거라 생각하는 이정출. 애초에 김우진에게 접근했을 때부터 정채산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엿보긴 했었지만 막상 그런 순간이 닥치고 보니 감당이 안 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정출은 자신이 여기서 나가면 전세가 역전될 거라고 으름장을 놓지만 김우진은 그 정도 협박엔 콧방귀만 뀔 뿐입니다. 총독부 경부가 의열단 단장이랑 밤새도록 술마시고 호형호제 했다는 소문이나 돌 뿐이라고 말이죠. 


김우진의 말은 이정출에겐 협박처럼 들리겠지만 사실은 이 식탁에서의 ‘진짜’ 계획을 말한 것입니다. ‘밤새 술 마시고 호형호제’가 되어보자는 것! 문밖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몰래 엿듣고 있는 정채산은 방 안에 있는 김우진과 함께 이정출을 긴장시켰다 풀어줬다 하면서 고도의 심리전을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적당한 타이밍이 되자 정채산은 방안으로 술독을 들여보내는데요, 목욕통만큼이나 거대한 술독을 보자 이정출은 또 한 번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랜만에 고향 얘기나 하면설 실컷 마시자는 정채산은 김우진과 이정출에게 직접 술을 따라주는 것은 물론 의열단 막내 단원들까지 챙기며 술잔 가득 술을 따라 줍니다. 이때부터 영화는 대략 1분 30여 초의 시간 동안 무려 열 번의 “자!”라는 대사 말고는 다른 특별한 대사도 없이 오직 술만 마시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 이유는 밤새도록 함께 술을 마신 사람들 사이에 생기는 왠지 모를 그 끈끈한 정과 의리를 이정출에게 느끼게 해주고 싶었던 정채산의 의도를 보여주기 위함일 것입니다. 정채산은 이정출이 조선인들에게는 미움을 받고 일본인들에게는 의심을 받으며 홀로 외로울 수밖에 없는 ‘밀정’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말없이 술을 마셔주는 이 식탁의 남자들이야 말로 진정한 동지이자 같은 핏줄의 동포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거대한 술독을 모두 비워낸 후, 정채산은 이정출을 데리고 밤낚시를 하러 갑니다. 술자리에선 "자!"라는 말밖에 안 하던 정채산은 밤바다에 와서야 비로소 자신이 하려던 진짜 이야기를 꺼냅니다. 아마도 술자리에서 술김에 하는 이야기는 신뢰할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찬바람 쐬고 머리가 맑아진 맨 정신에서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어디에 올려야 할지를 정해야 할 때가 옵니다. 이 동지는 어느 역사 위에 이름을 올리겠습니까?”


정채산은 이정출을 이 ‘경부’라 부르다가 점차 이 ‘동지’라고 부르더니 마지막에는 더 친밀함을 보여주듯 이 ‘형’이라고까지 부르며 이정출의 마음을 점차 감화시켜 나갑니다. 정채산의 부정하기 힘든 옳은 말과 뜨거운 진심이 느껴지는 행동에 이정출은 감동과 부담을 동시에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쉽지 않은 선택의 기로에 서서 갈등할 수밖에 없는 이정출. 끝까지 일본경찰의 본분을 다할 것인가, 새롭게 항일단체의 일원이 될 것인가?  앞으로 생사를 가를 결정의 순간이 찾아온다면 이정출은 과연 어느 쪽 편에 서게 될까요?




영화 <밀정>(감독 김지운)은 1920년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항일 독립운동단체 의열단과 일본 경찰 사이를 오가며 활약했던, 조선인 밀정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입니다. 


1920년대. 이 땅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나라를 잃은 사람들과 나라를 바꾼 사람들. 

나라를 잃은 사람들은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기 위해 목숨을 바쳤고, 나라를 바꾼 사람들은 일본 제국주의에 복종하고 충성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조선과 일본 중 어느 쪽에 서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며 시대의 흐름에 따라 경계를 넘나들던 회색지대의 사람들. 하지만 그들도 어느 순간에는 선택의 기로에 놓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줓첩자에게도 조국은 하나 뿐이며 이정출에게도 분명 마음의 빚은 있을 것입니다.  정채산은 이정출의 그 '마음의 빚'을 이용자자는 것이었죠.                                                                               


"이중첩자에게도 조국은 하나뿐이요. 그에게도 분명 마음의 빚이 있을 거요. 그걸 열어주자는 겁니다. 마음의 움직임이 가장 무서운 거 아니겠소.


일본 경찰과 의열단의 경계에 서있는 밀정 이정출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있는 의열단 김우진과 의열단장 정채산을 만나 그들의 뜨거운 진심을 목격하면서 조금씩 마음이 움직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정출이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기로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 이유는 아내가 차려 놓은 밥상 옆에 누워 곤히 자고 있는 자신의 어린 아들을 보면서 문득 다시 떠오른 어떤 질문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나의 아들은 장차, 어느 나라의 식탁에 수저를 올리고, 어느 나라의 밥을 먹으며 살아갈 것인가?


영화 <밀정>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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