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중독 (2014)
복숭아 더 드세요.
햇살 좋은 숲 속에서 두 쌍의 부부의 피크닉을 즐기고 있습니다. 베트남전이 막판을 향해 치달아가는 1969년. 교육대장 김진평 대령(송승헌)과 아내 이숙진(조여정)은 김진평의 부하 경우진 대위(온주완)와 그의 아내 종가흔(임지연)과 함께 나들이를 나왔습니다. 샌드위치 도시락과 복숭아를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시던 중 숙진과 우진이 화장실을 간다며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다소곳한 자세로 복숭아를 깎던 가흔이 연신 담배를 피워대는 진평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조심스레 복숭아를 더 먹으라고 권합니다. '담배 많이 피우는 사람에겐 복숭아가 좋다'면서 말이죠.
진평는 가흔이 예쁘게 깎아준 복숭아를 정말 맛있게 먹기 시작하는데요, 잘 익은 복숭아에서는 다디단 단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그런데 가흔이 진평에게 복숭아를 먹으라고 권하는 이 장면은 웬일인지 이브가 아담에게 선악과를 권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브가 권한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게 된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결국 쫓겨나게 되는 것처럼, 진평과 가흔 또한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고 엄격한 군 관사에서 쫓겨날 것이라는 암시하는 일종의 복선으로서 말이죠.
그런 복선의 이유 말고도 이 장면에서 가흔이 하필 복숭아를 깎고 있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는 듯이 보입니다. 복숭아는 여성의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과일입니다. 그런 이유로 가흔이 진평에게 계속 복숭아를 먹으라고 권하는 이 장면은, 어떤 의미에서는 은밀하고 섹시한 유혹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가흔이 은근히 진평을 유혹하고 있음은 그녀의 말에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가흔이 입원을 하자 사고 현장에서 그녀를 구해주었던 진평이 병문안을 간 적이 있었는데요, 가흔은 그때 진평이 문병을 와준 게 좋았다고 스스럼없이 얘기를 합니다. 각각의 배우자까지 네 명이 함께 있을 땐 아무 말 없이 얌전히 앉아만 있던 가흔은 진평과 단둘이 있는 지금 이 상황이 진평에 대한 자신의 호감을 보여줄 수 있는 일종의 기회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진평이 병문안 왔던 날, 꽃다발 가져온 것도, 통조림 먹여준 것도 좋았다는 가흔은 그날 일을 떠올리면 자꾸 웃음이 난다는 말로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그녀의 말을 듣자 어디서 갑자기 용기가 생겼는지 진평도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가흔 생각을 하루 종일 한다고 말이죠.
자기도 모르게 고백을 해버린 진평도 부끄러워하고, 뜻밖에 고백을 받은 가흔도 혹시나 누가 들었을까 당황스러워합니다. 어색해진 상황을 바꿔보려고 가흔이 진평의 라이터 문양이 예쁘다며 관심을 돌리자 진평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물건임에도 가져가라며 가흔의 핸드백에 라이터를 집어넣고는 얼굴을 붉힙니다.
이 장면 또한 두 사람이 뜨거운 욕망을 상징하는 일종의 ‘메타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남성의 상징인 라이터(남자가 아끼는 물건)를 여성의 상징인 핸드백(여자가 아끼는 물건) 속에 넣는다는 것. 이것은 가흔을 향한 진평의 욕망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병문안 갔을 때 진평이 가흔의 귀에 귀걸이를 끼워주었던 행위보다 훨씬 더 커지고 발전된 강한 욕망의 표현 말이죠. 하지만 진평에게 가흔은 부하의 아내이고, 가흔에게 진평은 남편의 직속상관인 관계.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두 사람의 관계는 과연 어떻게 될까요?
영화 <인간중독>(감독 김대우)은 불륜의 변화 과정을 대부분 식탁에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무척 인상적인 멜로 영화입니다. 김진평과 종가흔, 두 사람이 만나고 관계가 점점 발견하게 되면서 그들이 먹는 음식도 점점 더 좋아집니다. 처음 병실에서의 만남에선 겨우 통조림 케이크를 먹었으나 부부동반 피크닉을 갔을 땐 샌드위치와 복숭아를 먹습니다. 이후 가흔의 집에서 함께 한 만찬에선 와인과 바나나를 먹고, 마침내 단 둘이 식탁에 마주 앉았을 땐 생일날만 먹는 특별한 음식인 미역국을 먹게 됩니다. 하지만 두 사람 앞에 놓인 음식이 점점 더 고급스러워지고 더욱 특별해질수록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의 관계는 점차 위기를 향해 다가갑니다. 진평과 가흔의 관계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두 사람에 앞에 놓여있는 음식은 성대하게 차려진 숯불 바비큐였는데요, 두 사람이 지금까지 먹었던 음식 중 가장 맛있고 비싸고 고급스러운 음식 앞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결국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영화 속에는 진평이 아내 숙진과 집에서 식사하는 장면도 몇 번 나옵니다. 그런데 진평과 숙진의 식탁 분위기는 진평에게 큰 부담이었습니다. 오직 남편의 장군 승진과 임신만이 전부인 아내 숙진의 끝없는 수다는 차분하고 욕심 없는 성격의 진평을 숨 막히게 합니다. 진평이 가흔에게 몇 번이나 “숨을 못 쉬겠어요.”라고 말하는 이유 중에는, 집에서 아내와 마주 앉은 식탁의 그 숨 막히는 분위기도 분명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가흔의 부부생활도 진평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가흔의 남편 경우진 역시 오직 자신의 승진 문제에만 골몰했고, 아내 가흔에게는 무조건적인 희생과 복종을 강요하며 그녀를 숨 막히게 하는 남편이었습니다. 그러니 진평과 가흔은 각자 집안에서 각자의 배우자와 단둘이 마주 않은 식탁에서는 숨이 턱턱 막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부부 사이의 식탁이 불안할 때, 그 자리에 누군가 끼어들게 되면, 설상가상 그 누군가가 굉장히 매력적인 사람이라면, 그 식탁에서는 불륜이 시작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니 누군가와 식탁에 앉게 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그 식탁에 앉은 누군가가 혹시라도, 나의 남편, 나의 아내를 탐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