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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영목 Mar 30. 2019

장미 인척 하는 배추

제4장 디자인진행요령(일반)_06

20여 년 전 가전회사의 디자인실에서 약 14년간 실무를 하고 나서 D여자 대학에 시간강사로 4학년 졸업 전을 지도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학생들과 작품 상담을 하고 각자 도면을 그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저로서는 충격적인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도면을 그리라고 했더니 노트를 찢고 헬로키티 자를 꺼내고 스누피 컴퍼스와 반짝이가 붙은 샤프로 도면을 그리는 것이 아닙니까. 한 학생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여학생들이 비슷한 캐릭터나 팬시용품 자, 샤프 등으로 도면을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 그야말로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저의 기준으로는 전문제도 용품 회사에서 만든 제도 용구에 방안지 정도는 써서 도면을 그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도 기가 막혀서 멍하니 있는데 도면을 그리는 학생들의 표정은 의외로 매우 진지하였습니다.       


그때 언뜻 머릿속을 스치며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내가 디자인했던 가전제품이 인간의 생활에 도움이 되었을까? 아니면 스누피가 인간의 생활에 더 도움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답은 말할 것도 없이 스누피입니다. 제가 했던 가전제품의 디자인은 주로 한국 사람들에게 그리고 몇 년 쓰고 나면 생산이 중단되는 제품임에 반하여, 스누피는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수십 년간 많은 위로와 행복을 가져다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내가 스누피 샤프와 헬로키티 자로 도면을 그리는 학생들에게 “야! 이게 디자이너로서 일을 하는 태도냐?”라고 야단을 쳤더라면 어쩌면 제2의 스누피나 헬로키티는 세상에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수업시간에 디자인 사례를 가능한 학생들에게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이것이 좋은 디자인의 예이다.”라고 사례를 제시하면 학생들이 자신의 생각이나 취향에 맞는 디자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제가 보여준 디자인을 흉내 내려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장미를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장미밖에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잔디도 없고, 개나리도 없고, 벼도 없고, 배추도 없고, 잡초도 없고, 오로지 장미밖에 없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아마 장미가 지긋지긋할 것입니다. 장미로 밥을 지를 수도 없고, 장미로 김치를 담글 수도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장미를 모두 베어버리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을 고백할 때에는 장미가 있어야 하고, 김장을 할 때는 배추나 무가 있어야 하고, 강변에는 억새풀이 있어야 하고, 아무도 돌보지 않는 벌판에는 잡초가 무성해야 합니다.      



디자인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디자인에 '절대'는 없습니다. 그 사물이나 제품이 필요로 되는 상황(장소, 시간, 사용자 등에 따라)에 맞는 디자인이 좋은 디자인입니다. 


만일 장미가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며 다른 식물들을 경시한다면 배추가 장미 인척 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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