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영은 올해로 딱 30세가 되었다. 여대를 졸업하고, 졸업하기 전 만난 동갑내기 남자친구와도 벌써 8년차 연애에 접어들었다. 결혼을 약속한 사이이긴 하지만 아직 결혼은 계획을 못하고 있다. 남자친구는 수험생이자 취준생, 부영 본인도 아직 정규직 사원이 아닌 계약직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회사에서 부영이 HR coordinator로 일하기 시작한 지는 1년 반 정도가 되었다. 전에는 아주 조그만 외국계 회사에서 ‘경영지원부서’ 라고 불리며 인사/총무/그 외 사무 업무들이 모조리 섞여있는 부서에서 정규직으로 근무했었다. 비자 업무, 항공권 발권, 그 외 반복적인 관리업무들을 서포트 하던 어느 날, 부영은 좀 더 큰 곳에서 전문성을 쌓는 일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전 회사에서는 정규직이었지만 이 다음 기회에는 ‘꼭 정규직이 아니어도 하고 싶은 일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일 중 하나가 인사 업무였고, 지금의 자리는 그렇게 공들여 얻게 된 자리였다.
부영은 대학시절 노력해 교환학생을 1년간 다녀온 덕에 원어민은 아니어도 영어에 대한 거부감이 거의 없었다. 첫 회사에서도 주로 영어로 이메일을 쓰고, 국내에 있는 외국인들과 소통하며 업무를 했어야만 했다. 그래서 커뮤니케이션 할 때 제일 중요한 부분은 ‘한 치의 오해도 없는, 칼 같이 명료하고 명확한 의사소통’이었다. 이메일을 쓸 때도, 말을 할 때도 모든 증빙을 남기고 정확하게 소통하려 노력했다.
새로운 회사에서 인사담당자로 일한다는 건 이전과는 또 다른 차원이었다. 주어지는 어드민 업무들을 열심히 쳐내면서, 떄로는 굳이 시키지 않은 일도 먼저 하거나 직원들에게 용기내 다가가보기도 했다. 그런데 1년쯤 지났을 때부터 돌아온 피드백은 기대와는 조금 달랐다. 이전 회사에서처럼 ‘정확하게’ 소통하려던 일하던 방식이, 새로운 회사의 인사 업무에서는 오히려 오해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생기곤 했다. 메일이나 메신저에서 직원들과 주고받는 커뮤니케이션에서, 부영의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말투가 인사팀에서 현업을 서포트 하는 것이 아닌 무언가를 감시하고 시키는 듯한 느낌을 받는 이들이 많다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때로는 과한 친절로 인사팀에서는 해서는 안될 쓸데없는 이야기(?)가 소문을 타고 돌아 임원 귀에 들어가 주의를 받은 적도 있다.
전 회사에서는 인사팀이 없었고, 막상 입사하고 나서도 코로나를 이유로 전 직원이 전면 재택근무에 돌입하면서 실제로 다른 인사담당자들이나 인사팀장이 주 고객인 직원들과 어떻게 상호작용 하는지 지켜볼 기회가 적었던 부영은 혼란스러웠다. ‘일 잘한다’라는 말을 듣고 싶어 노력해왔는데 인정은 못 받고, 그럼 이 에너지를 어디로 쏟아야 하는지 알려주는 이도, 물어볼 곳도 없었다. 팀장은 계약직의 부영을 때가 되면 바꿀 소모품쯤 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답답한 마음을 안고 점심시간이면 혼자 회사 근처를 걷는게 그나마 탈출구였다.
그러던 어느 날, 부영을 채용했던 팀장은 갑자기 미국 유학을 간다며 회사를 떠났다. 그리고 몇 달이나 지났을까. 새로운 팀장이 왔다. 팀장과 둘이 점심을 먹는 시간이 늘었고, 새로 온 팀장에게 회사 주변의 맛집과 산책길을 소개해주며 친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부영의 남자친구는 그동안 큰 시험을 치르고 다음달이면 나올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도 미끄러지면 내년까지 1년을 더 공부해야 하기에, 이번 달에는 가까운 일본이라도 여행을 다녀오자고 부영에게 제안한 참이었다.
‘남자친구가 이번엔 꼭 붙어서 프로포즈를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친구들 중 결혼하는 사람도 하나씩 생겨나고, 긴 연애를 결혼이라는 새로운 시작으로 바꾸고 싶은 마음이 큰 부영이었다. 새로 온 팀장에게 휴가일정을 조율하기 위해 얘기를 꺼내던 차에, 새 팀장이 물었다.
“부영님, 부영님은 그럼 올해도 이제 다 끝나가는데.. 내년에 꼭 이루고 싶은 뭔가가 있어요?”
“음.. 결혼이요?”
“근데 결혼은 남자친구가 시험에 붙어야 할 수 있다면서요. 그럼 그건 부영님이 잘하고 말고랑 상관 없는거 아니예요? ㅎㅎ 부영님이 잘해서 만들고 싶은 ‘무언가’는 없어요?”
부영은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노력해서 얻고 싶은게 뭐지?’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