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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주씨 Feb 19. 2024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토지 1부 1권, 통권 1권 


토지 1권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으라는 주제를 받아 들고 이번 주는 계속 생각해 봤다. 

무엇하나 허투루 넘길 대목이 없다. 


1897년 한가위. 하고 시작하는 단호함부터 절절한 용이와 월선의 사랑, 어디서 나타났나 싶을 임이네의 강인한 생명력, 귀녀의 신분을 뛰어넘은 대담한 욕망, 윤 씨 부인의 평생을 옭아맨 한과 청승스레 노래하고 객구물리는 봉순이의 어쩔 수 없이 타고난 기질까지 하나하나 다 새롭고 귀하다. 선생님은 어떻게 토지를 이렇게 쓰셨을까. 


문득 생각이 나 토지의 2002년판 서문을 다시 읽어봤다. 지리산의 한(恨)을 말씀하시다 울음이 터져 깨달으셨다는 말씀이 마음에 맺혔다. 당신 안에 새겨진 그 원형을 옮겨 내야하는 운명을 타고 나셨구나, 평생을 짊어지고 외롭게 걸어오셨구나, 그래서 논두렁에 앉은 윤보도, 질투에 눈이 멀어 기어이 읍내로 뛰어가 월선이를 절단내고 온 강청댁의 억셈도 그렇게 다 쓰실 수 있으셨구나. 


어릴 때는 사람은 꼭 선한 존재여야 하고 그것만이 옳고 바르고 전부라고 믿었던 적도 있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이 사람 안에 얼마나 많은 모순과 아이러니와 부조리 하다못해 드러내고 싶지 않은 못난 자신만의 흙구덩이까지 무수한 것들이 면면이 등을 맞대고 들어앉아 휘몰아치고 있는지를 알아가는 것인가 이제야 겨우 그런 생각의 꼬리라도 잡는 일이구나 한다. 비릿하고 불쾌한 김평산을 쓰시면서 선생님은 어떤 마음이셨을까. 읽는 것만으로도 등장인물에 한껏 정을 주고 바라보는데 쓰시면서 힘드시지는 않으셨을까. 


엄마 데려와 하고 패악을 부리는 서희의 서슬 퍼런 쨍함도, 큰스님이 전하신 마음을 윤 씨 부인을 통해 느끼는 어린 길상이의 서러움도 어떻게 마음을 나눠서 손꼽을 수 있을까. 그리고 산천을 향한 사랑이 갈피갈피 빼곡한 순간들을 또 어떻게 빼놓을 수 있을까. 그림을 그리듯 마음을 두고 쓰신 부분들도 마음에 다 남았다.  


‘끝이 누우렇게 옹그라붙은 보리와 붉은 흙이랑에 봄서리가 내리고, 논바닥에는 거름과 부토더미가 군데군데 놓여져 있었다. 게 다리같이 앙상하게 꾸부러진 뽕나무를 보아서는 아직 봄이 먼 것 같지만 그러나 최참판댁 별당과 사랑 뜰에는 옥매화가 방금 열릴 것 같이 봉오리를 물고 있었다.’ 159p, 9장 소식 중. 


이런 아름다움들이 빼곡하다. 처음에는 줄거리를 따라 읽었고, 두 번째는 가까워진 인물에 몰입했고, 세 번째는 이런 아름답고 서정적인 다정함들을 군데군데 남겨주신 선생님을 생각했다. 

어찌하여 토지인가. 

이 땅에 생겨난 것들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는 풍경과 계절과 그들의 스침과 만남을 이렇게 한 조각 잘라내 그림처럼 토지 안에 걸어두신 것만 같다. 


 너무 많은 아름다움을 쉽게 본 사람은 빚을 진 것만 같다. 나는 도저히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을 꼽지 못하겠다. 이미 사랑하는 것들은 차고 넘쳐 다 하나씩 의미를 지니기 시작했는데 꼭 하나를 꼽으라니 그 의미들에 순서를 붙이는 것만 같아 마음이 어쩔 줄을 모르겠다. 마음에는 차등이 없다. 그럼에도 가장이 붙을만한 순간들을 꼽아야 한다면 그건 좀 더 생각해 보겠지. 


그래도 하나 꼭 분명한 것은, 나는 김평산이 너무 싫다. 겨우 이거 하나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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