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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주씨 Feb 28. 2024

지각에는 변명이 붙는다(2)

토지 2부 1권, 통권 5권


굳이 늦은 이유를 붙이자면 통영에 갔었다. 박경리 선생님의 고향. 표지판에 선명한 선생님의 흔적, 박경리생가, 박경리기념관. 근처를 빙글빙글 돌 듯 그곳들엔 가지 못했다. 연주회가 있었다. 바다를 실컷 보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듣고 돌아왔다. 


숙제를 미룬 마음은 내내 개운하지 않게 토지 생각을 했다. 이번 주(라고 하기 에는 지난주지만) 주제는 ‘만약 내가 소설 속에 잠시 등장할 수 있다면 소설 속 인물 누구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은가’였다. 아니 내가 소설 속으로 들어간다고? 내 역할은 뭐지? 토지 속 인물들과 가까워야 말이라도 얹어 볼 텐데 나는 누구지? 실마리가 풀릴 리가 있는가.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할지 생각이 정리되지 못하니 머릿속에 괜히 딴생각만 떠오르고. 첫 문장은 결국 떠오르지 않았고 시간이 다 흘렀다.


먼저 안타까워 어쩔 줄 몰랐던 월선이에게 위로의 말을 해줘야지. 월선이의 인생에 감히 누가 조언을 붙일 수 있을까. 마음 하나를 향해 저렇게 지고지순한 여자를 감히 누가. 월선이는 그저 안아줘야 한다. ‘말 안 해도 니 마음 안다. 사느라고 욕 본다 월선아.’


아니면 월선이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임이네 에게 호된 질타를 할 수 있을까? 당장이라도 쫓아가 등짝을 후려치고 사람이 그러면 안 된다고 덤볐다가 임이네한테 머리채를 잡힐 것 같다. 누가 임이네를 이길 수 있을까. 주변에 저런 인물이 있다면 절대 엮이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용이는? 이 답답한 인사를 어쩜 좋을까. 자식 낳아준 여자를 버릴 수도 없고, 마음 준 월선이를 버릴 수도 없다. ‘용아!! 임이네 단도리 좀 단디 못하겠나? 눈뜨고 등치는 저 행사를 그냥 보고만 있을 거가? 도망가지 말고 불쌍한 월선이 숨구멍이라도 제대로 뚫어줘야 할 거 아니가!’ 말도 다하기 전에 가슴을 치겠지. 갑갑하고 답답해서. 


새로 등장한 갑갑한 인물이 또 있다. 이상현. 정혼처만 없었다면 윤 씨 부인이 서희 짝으로 맘에 들어했던 아이. 이상현은 간도로 가는 서희 일행을 따라 함께 간도로 간다. 아버지의 안부를 확인하고 곧 돌아오겠다고 부인에게 약속했지만 고향집을 떠나 서희 주변을 맴돌듯 간도에서 교사로 일하며 돌아가지 않는다. 저 시대 지식인들의 애매한 위치가 이상현을 통해 생생한 느낌이다. 나라가 망했다는 절망감은 무기력으로 돌아왔을까. 내 배움이 벽처럼 버티고 선 현실을 바꾸는데 아무 소용도 없다고 느낄 때 나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애정이 있는 결혼은 아니다. 정혼하고, 혼례를 치르고, 자식을 낳아 대를 잇고 살아가는 일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개인의 태동은 관습 앞에서 충돌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상현의 선택이 옳은가? 이름도 제대로 등장하지 못하는 이상현의 처는 남편도 없는 시집살이에 오지 않는 사람을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하는데 그 처는 무슨 죄인가. 가혹하지 않은 일이 하나도 없다. 


‘이 선생, 처를 생각하셔야지요. 본인의 고통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관습으로 얽혀 맺어진 사이라 해도 처는 이상현 당신만을 기다립니다. 누군가를 고통스럽게 하고서 얻는 학문적 자유나 인식의 자유가 얼마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소식이라도 전했습니까? 그리고 선명하지 못한 마음으로 서희 곁에 맴돈다고 안 될 일이 될 리도 없습니다. 일단 하동으로 가서 부인을 만나세요. 지금 이 선생은 마음속에 닻 내릴 곳이 필요해 보입니다. 본인의 위치를 인식하고 숨 고르고 생각하세요.’ 


어째 남자들은 이래 못났을까. 이름 내걸고 바깥 활동을 할 수 있는 자유가 그렇게 하찮을까. 비겁한 행태를 보이는 윤이병도 입에 올리기도 싫은 김두수까지 다 이름을 갖고 있는데 이름을 두고 사는 모양이 저렇게 비겁해서 어쩌나. 갑갑해서 자꾸 가슴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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