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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주씨 Feb 27. 2024

지각에는 변명이 붙는다.

토지 2부 1권, 통권 5권


친구들과 함께하는 토지 읽기는 방학 중이고, 한 달에 한 번 토지 읽기 감상을 나누는 톡토로 토지 줌 모임은 지쳐 잠들어 참석하지 못했다. 한주에 한 번씩 쓰던 리뷰도 처음으로 건너뛰었다. 팔월은 유난히 고단했다.  


홍범도 장군이 고초를 겪고 계신다.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 그 미래가 지금이다 하는 말.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충격에 어지러웠다. 하필 그 시점에 치욕스러운 을사늑약을 읽어냈고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지난주는 토지 읽기도 잠시 내려두었었다. 백 년 전 역사를 다시 되풀이하는 이 나라가 너무나 환멸스러웠다. 대의명분을 갖고 살자는 얘기가 아니다. 최소한 양심적인 개인으로 아름답게 살아갈 수는 없는 걸까. 그렇게 구월이 왔다. 


한주 건너뛴 토지는 자꾸 마음에 걸렸다.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찜찜한 마음은 지각이지만 기록을 마치고 마음 한 끝이 후련해졌다. 올해 토지 읽기를 시작할 때, 고등학생 시절 끝맺음을 하지 못했던 토지 읽기를 지금이라도 한 번 완성해 보자 하는 작은 마음에서 쉽게 생각하고 시작한 일이었다. 친구들과 새벽시간을 공유하며 각자 묵묵히 읽고, 한 달에 한 번 줌 모임으로 톡토로 님들과 생각을 나누며 내 안에 새겨진 감각과 생각들을 다시 한번 숨 고르기 한다. 그리고 토지문화재단 토지읽기 4기를 계기로 한주에 한 번 생각을 글로 정리하고 있다. 그냥 읽기만 하는 것보다 좀 더 애틋하게 토지를 바라보게 된다.


박경리 선생님을 마음 깊숙이 존경한다. 좀 우습지만 토지를 읽으며 혼자 한 생각이 있다. 선생님께 의리를 지키고 싶다. 이 글을 고통을 참고 써내신 선생님도 계신대 내가 읽기를 게을리해선 안 된다. 고통스러웠던 건 우리의 역사고 눈 돌려서는 안 된다. 고독하게 평생을 버텨 써오신 선생님을 생각하면 읽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 


홍이가 불렀다. “간도댁 옴마” 용이의 안부를 알지 못하는 불안, 무작정 집으로 밀고 들어온 임이네의 횡포에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월선이의 마음은 스르르 녹아 무너져 내렸다.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더욱더 안으로 조여들던 마음에 단비 같은 한마디. 자신이 낳지 못했으나 용이를 닮은 홍이를 한 번 안아봤으면 하고 생각만 하던 월선이는 단박에 아이를 사랑하고 만다. 사랑이라는 게 그런 건가. 얼굴이나 보고 살았으면 하는 마음. 미련할 만큼 다시 돌아와 머무르는 것. 그저 곁에 있고 싶다는 마음. 어쩌면 본질은 너무 약하고 순해서 스쳐 지나기 도 그만큼 쉬운지도 모른다. 자꾸 생각하고 되새겨야 한다. 줘버린 마음에도 책임을 느낀다. 이미 사랑하는 토지 속 인물들을 응원하는 마음을 생각해도 멈춰서는 안 된다. 


청년이 된 길상이의 고뇌를 통해 박경리 선생님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셨나 다시 한번 숨 고르고 되새긴다. 


천지는 노을에 물들어서 이 세상이 아닌 것처럼 아름다웠다. 일몰 후, 물기를 머금은 듯 싱싱하고 푸르른 들판, 생기에 넘친 푸른 들판 가득히 강물 가득히, 그리고 끝없는 하늘과 구름에도 노을이요, 쉴 새 없이 잔잎새를 흔들어대는 버드나무 사이에도 점철된 노을은 곱기만 하다. 길상은 이처럼 아름다운 노을을 본 적이 없다. 6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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