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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주씨 Mar 16. 2024

봉순이와 기화

토지 3부 3권, 통권 11권


“양현아?”

“예.”

“내년에는 진주 집으로 가야지. 오빠들이 널 보고 싶어하니까.” 303p


길상이 경성 감옥에 수감되었다. 서울을 다녀온 서희는 이틀을 진주 집에 머문 뒤 평사리로 왔다. 세상 사 다 놓아버린 기화가 평사리에서 어린 딸 양현이와 머물고 있다.


... 종국에는 마약에까지 손을 대어 한 줄기의 빛과 같았던 양현을 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최초엔 길상을 잃었고, 다음은 상현으로부터 버림받았고, 잃어버렸기 때문에 스스로를 버린 기화는 또 버림받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잃었고, 마지막 희망을 버렸기 때문에 그는 모든 사물에 대한 인식을 망각한 것이다. 도망은 상실과 망각에서 오는 일종의 충격일까. 331p.


바람같이 부표같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살던 봉순이는 결국 다 놓아버렸다. 나는 봉순이가 너무 애틋해 못 견디겠다. 혼자 버티고 살아낸 세월을 두고도 봉순이는 결국 온전하게 옆에 선 사람 하나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양현이가 그 뿌리가 되어줄까 했으나 지켜야 할 대상을 향해 마음을 기대기에는 아무래도 무리였나 보다. 봉순네가 애기 봉순이를 들쳐 업고 다시 최참판댁으로 들어와 바느질하며 한세월 버텨낸 것은 떠나기 전 살뜰했던 남편과의 시간이 있어서 가능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종종 가장 빛나던 한때를 두고 살기도 한다. 그리움은 다시 올 수 없는 대상을 향해 안으로 깊어진다. 봉순네의 뿌리는 그리움이고 자라나는 봉순이였다. 그러나 봉순이에게는 뭐가 남았나.


기생이 되어 새 이름을 얻었다. 기화. 타고난 재주가 남달라 소리가 좋고, 인물 곱던 봉순이는 기화가 되었다. 새 이름은 다른 인생이다. 기생으로 산다는 건 굴곡진 길을 간신히 버텨 한밑천 잡고 돈이라도 뿌리삼아 세상에 발을 디뎌야 하는 것. 평생을 함께한 서희와 길상이 존재하는 날들을 제 손으로 자르고 들어선 기생의 삶은 녹록치 않다. 사람이 그립다. 순하고 눈물 많은 봉순이는 기생이 되어서도 무르다. 어디에도 제대로 마음 주지 못하고 안주하지 못한다. 마약은 삶을 향해 가늘게 이어지던 기화의 마지막 끈마저 다 끊어놓았다. 서희는 병들고 지친 봉순이를 평사리로 불러 살게 하지만 기화는 견디지 못한다. 봉순이로 살았던 날들은 희미하고 기화로 살아온 세월을 지나 다시 봉순이로 살 수도 없다.


“아니야, 우리가 언제 또 이렇게 만날 수 ...... 없을 거야. 집 없는 강아지같고, 항상 떠날 차비를 하는 철새 같고 ...... 어디 비비고 기댈 것이라곤 없었어. 어쩌면 그렇게들 인색했던지.” 369p.


기화는 비루한 사내 이상현을 사랑했나보다. 끝내 마음을 주었나보다. 보내버린 마음, 오지 않을 사람을 기대하는 마음은 순하고 고운 사람이 한 세월 버티며 그래도 지켜온 얼마쯤 의지라고 부를 것들마저도 다 소진시키고 결국, 바닥을 드러내고 메말라버렸다. 제발 살라고 채근하는 석이의 외침도, 어떻게든 붙잡아 사람답게 살게 하고 싶은 서희의 다정도 아무 소용이 없다. 혼은 이미 죽었고 껍데기만 숨을 쉬고 있다. 애가 탄다. 봉순이를 어쩌면 좋나.


다정다감했던 그 감성은 어디로 갔는가. 사무치게 깊었던 그 숱한 한은 어디로 갔는가. 너그럽게 이해하고 푼수를 알며 물러나 앉을 줄 알던 그 조신스러움은 어디 갔는가. (...) 무엇이 이 여자를 이렇게 만들었나. 다정다감함이 유죄요, 다정다감함의 단죄인가. 30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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