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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주씨 Mar 19. 2024

다정한 사람, 주갑이

토지 3부 4권, 통권 12권


“어떻게 보면 주서방 그 사람은 모든 인간적인 요소를 다 갖추었다고나 할까요? 욕심만 빼고. 그런데 조금도 위대하진 않단 말입니다. 비극적인 요소를 낙천적으로 발산하기 때문에 그런지 모르지만. 어린애같이 무심한가 하면 수천 년 묵은 구렝이 같고.” 187p.


용이가 산판일을 갔다 만나서 용정까지 함께 왔던 주갑이. 노래 잘하고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 메인 데 없이 바람처럼 살지만 인사할 자리는 꼭 나서고 순하고 어린것들을 향해 스스럼없이 등을 낮추고, 배움 앞에 공손하고 함부로 하지 않는다. 주갑이는 처음 등장할 때 그냥 간도에서 스쳐가는 인물일까 생각했었다. 간도 간 평사리 일행과 교류하며 지내다 사람들 사이로 깊숙이 들어온다. 


살기 어려워 내 나라를 버리고 간도 땅까지 흘러왔지만 아무리 외로운 타향살이라 한들 겉만 훑고 지나는 사람에게 마음을 내어줄까. 간도 땅 각지에 숨은 독립 인사들의 소식은 주갑이의 입으로 전해진다. 하물며 기화의 죽음을 상현에게 전하는 것도 그다. 홍이의 어릴 적 친구 정호의 소식을 주갑을 통해 들으며 기분이 묘했다. 가족도 없는 그가 황량한 간도 땅을 헤매듯 살아도 주변에 그를 싫다 하는 사람이 없다. 함께 하는 순간에 진심으로 걱정하고 내 자리인 듯 녹아들어 어울리고 정을 준다. 길상이 잡혀간 뒤 용정촌도 옛날 같지 않고, 공노인은 다녀가는 그를 마음으로 의지하고 기다린다. 스치듯 지날 줄 알았던 주갑이가 어쩜 저렇게 천연덕스럽게 살아 간도 땅 구석구석을 발로 밟으며 노래처럼 날아 사람들 사이에서 살까.


악을 쓰듯 <사향가>를 불러젖힌다. 그러나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질러대듯 하던 주갑의 소리는 차츰 본래의 노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혜관의 눈이 둥그레진다. 주갑은 보따리 안 든 편의 팔을 학의 날갯짓처럼 펼치며 몸부림치듯 몸을 흔든다. 145p.


평생에 한 번 보았던 사람, 고왔던 그를 기억하며 기화의 죽음을 애달파하고 진혼곡을 부르듯 주갑은 노래로 먼 곳의 기화를 배웅한다. 저 다정은 어쩌면 주갑이 생을 살아가는 힘인지도 모르겠다. 진실함이 그의 전부이고 재산이다. 어디로 흘러들어도 저 마음을 물리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마 임이네 정도로 패악질 부리는 인사가 아니라면 어느새 홀린 듯 주갑에게 마음을 열고 곁을 주게 되는 거 아닐까. 고단한 삶에 저런 다정함은 귀하다. 


주갑은 보따리 하나가 전 재산인 듯 가볍고, 가벼워 언제든 떠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다. 주갑이는 간도 땅 구석구석 사람들 인사를 챙기며 바쁘다. 그 다정함을 아는 이라면 ‘인자 저짝 어디 잠 댕겨와야 쓰것소’ 하며 훌쩍 떠난 그를 ‘아이고 올 때가 되었는데 왜 안 오나’ 하고 뭉근히 기다리게 될 것 같다. 기다린다는 건 누군가에게 자리를 내어준다는 얘기, 내 삶을 이만큼 열고 당신에게 이만큼 내 틈을 보여준다는 얘기다. 그런 얘기가 너무나 귀해진 지금, 사람들 사이에 스스럼없이 스며들어 자유롭게 노래하며 사이를 채우고 있는 곰살맞게 다정한 주갑이가 새삼스럽다. 


토지 속 고단한 이야기들 사이에 주갑이 풀어내는 다정이 꼭 필요하다. 그래도 살아가야 하는 날들, 누군가에 잠시 기대 잠시 웃고 싶은 날 떠오를 얼굴. 귀하게 챙기며 바라보면 쑥스러워 못 견디게 부끄러워하다 또 그게 너무 좋아서 자랑스레 웃으며 흥 넘치는 노래자락 풀어낼 것 같다. 

‘나가 한자락 불러야 쓰겄소~’ 


이제 조오타~ 하고 추임새를 넣을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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