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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주씨 Mar 22. 2024

토지의 힘

토지 4부 1권, 통권 13권


오늘은 12월 31일,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올해는 토지에 기대 잘 버텨왔다. 사는 일이 간단치 않아 고된 날이 많았다. 일상에서 도망치듯 마음을 두고 토지 속 이야기와 인물들에 마음을 주었다. 어느 날은 기댄 마음이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도 했다. 박경리 선생님은 읽어내는 사람의 마음까지 다 품어주시겠지 혼자 답을 내리고 마음껏 그냥 내 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두런두런 글자들을 지었다 허물었다 했다. 


4부 1권, 13권. 서(序)로 시작한다. 등장인물의 이야기도 아니고 말 그대로 그 시절의 이야기다. 오래 달려오신 선생님도 숨을 고르고 싶으셨을까. 이만큼 달려와 이제 나아갈 시간들의 고단함을 미리 일러두고 싶으셨을까. 20년대 후반, 광주학생운동으로 시작하는 저항의 날들이 앞으로 펼쳐진다. 참혹한 시절이다. 역사적 사실 앞에는 잊힌 그림처럼 사라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바닥을 받치고 있다. 그 당시를 살아낸 매일의 인물들이 이 땅의 바탕임을 선생님은 알고 계신다. 그들을 잊지 않으신다. 흑설탕 눈깔사탕 한두 개 이야기를 읽으며 그때를 생각해 본다. 


어떻게 버티고 나아갈 것인가. 그 이후에 온 사람이 그때를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고 담담하게 그러나 끓어오르는 마음을 잘 녹여 전달할 것인가. 책을 읽으며 종종 선생님은 어디까지 염두에 두고 글을 쓰셨던 건가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고 스러진 인물들과 그의 자식들 그 주변의 사람들로 이어지는 큰 흐름을 어째 하나하나 매만져 다시 불러내 누구도 무명이 아니도록 이름을 불러주시는 것만 같다. 이 땅의 사람들을 향한 큰 사랑이다. 토지는 점점 무한하다할까?


조찬하의 입으로 전해지는 생각의 갈래를 따라 읽으며 선생님이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럴까 생각도 해본다. 지배당한 땅의 사람들이 빠져들기 좋은 패배와 허무주의가 전부가 아니다 하는 목소리. 우리는 해방된 날의 현재를 살고 있지만 침략의 시대를 살고 있는 저 때의 이야기를 잊어서도 묻어서도 안 된다. 속속들이 알고 기억하고 반추하고 그래서 우리가 지배당했으나 그게 전부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한 민족이 나아가는 방향이 여러 부침이 있을 수 있으나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이야기, 우리는 결국 흘러서 내일로 흘러가야 한다는 이야기. 섣부른 애국주의자도 패배주의도 경계한다. 우리의 방향성을 내일을 생각해야 함을 몸으로 느낀다. 토지의 힘.     


애달파하던 봉순이가 죽고, 용이도 죽고, 서희는 나이 들어간다. 처음을 이끌고 온 인물들이 흐려지나 환국이와 윤국이는 다 자라 청년이 되고, 김환을 그리워하는 강쇠의 노랫소리가 앞으로 오고, 한복이 아들 영호가 해내는 한풀이가 있다. 주변의 관찰자 같던 영산댁의 입으로 전해지는 평사리 이야기도 새삼스럽다. 이 흐름을 잊지 말라고, 힘을 가진 주도적 인물들의 이야기가 전부가 아니라고. 매일을 살아내는 그때의 우리는 나아가고 있다고 기어이 흘러 내일로 간다고. 흐름이 어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흘러오던 그 느릿한 힘으로 밀고 앞으로 나아간다고. 거기엔 희망이 있다고. 


너덜너덜해진 일상을 추스르고 달래 저 희망에 기대 나도 나의 내일을 향해 흘러가보자 생각한다. 어떻게든 걸어보자 느슨한 결심 비슷한 것을 앞에 두고 희망을 생각한다. 내가 올해를 버텨온 힘, 토지가 나에게 준 선물. 오늘은 12월 31일이고 내일은 새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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