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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주씨 Mar 23. 2024

토지, 그래도 희망

토지 4부 1권, 통권 13권


4부 1권, 통권 13권 유난히 휘몰아친 느낌이다. 마음이 바빴던 걸까? 새로이 앞으로 성큼 나선 인물들 뒤를 따라 반쯤 뛰듯이 걸어온 것 같다. 환국이보다 존재감이 약하던 윤국이가 언제 이만큼 자랐나 싶었다. 


‘그 빛들을 다 가져야지. 하늘의 빛 땅의 빛 모든 것을 내 속에 가져야지!’ 259p. 


그래도 희망이 있다고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나아간다 생각했던 이유가 여기 있다 싶었다. 새로이 누군가 태어나 자란다는 것, 그 사람들이 다음을 채워간다는 것. 내가 어리던 시절에는 가지지 못했던 생각이다. 나는 생명이 다음을 이어간다는 생생함을 이렇게 만나게 될 줄 알았을까? 애정을 쏟았던 인물들을 보내고도 계속 다음을 이어갈 수 있는 힘이 된다.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은 선생님이 이 땅과 사람들에 가진 애정과 희망이 드러나는 방식일까, 고단한 시대에 그래도 버티고 살아낸 사람들에 대한 존경과 감사가 <토지>라는 이미 홀로 살아 숨 쉬는 개별적 세계, 그 거대한 무게를 견디고 다시금 힘을 내 계속 써낼 수 있으셨던 건 아닐까, 머릿속으로 가슴속으로 뒤엉켜 흐르는 생각과 감정들이 불쑥불쑥 이런 물음들을 불러낸다.  


그래도 아무래도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임명희의 자살과 각성이다. 


‘(···) 내게는 사랑이 없었구나. 있었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며 오해였어. 창조의 능력이 없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얘길 거야.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은 바로 그 창조의 능력 때문이지. 주여! 저에게도 사랑을 내리시옵소서! 욕망이라도 주시옵소서! 집착이라도 주십시오! 주여.’ 472p. 


극단적인 순간에 사람은 평생 살아온 행태와 양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전환점을 가지기도 한다. 조용하의 화초로 살아온 임명희가 스스로 걸어 나온 세계는 시련을 지나 바다 앞에 서게 된다. 바다로 뛰어든 임명희의 선택은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무명의 어부 부부 도움으로 통영 바다에서 살아 나와 어쩌면 생애 처음으로 가장 곤한 잠과 가장 달콤한 식사가 아니었을까. 임명희는 맛을 느끼고, 평생을 발 딛지 못하고 부유하듯 살아오며 느끼던 두통과 멀미에서 벗어나 진짜 멀미를 느끼며 처음으로 살아있는 생을 감각한다. 


길여옥을 만나 치욕스러웠으나 조용하가 행한 폭력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건 바다를 지나왔기 때문이다. 통영 바다는 임명희에게 분명 거대한 전환점이다. 의도하지 않았으나 거대한 끌림에 바다로 스스로 뛰어들었다 구출되었다. 새로운 일을 앞두고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하려 행하는 목욕처럼 명희의 선택은 같은 효과를 불러냈다. 바다 이후의 삶은 온전히 명희 본인의 선택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느껴진다. 평생 타자처럼 자신을 바라보던 임명희는 이제 오롯이 자신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너는 네가 갇혀 있던 벽을 뚫은 거야. 이제 넌 자유다.” 482p. 


임명희가 보여주는 희망은 윤국이가 보여주는 희망과는 결이 다르다. 윤국이가 가진 색이 처음부터 희망이라면 임명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발견해 낸 희망이다. 식민지라는 시대적 한계와 여성이라는 구조적 한계에 갇혀 타자화 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한 인간이 그래도 발견해 낸 귀한 희망이다. 생을 사랑한다는 것. 문장은 너무도 흔하고 흔해져 그래 사랑이지 하찮게 스쳐 지낸다. 한 시점을 지나 온몸과 마음을 관통하듯 문장을 몸에 새기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아포리즘과 경구들이 흔함에도 살아남아 빛이 되는 건 누군가의 각성이 있기 때문이다. 문장은 그 순간에 살아나 생동한다. 불에 손을 넣어야 뜨거운 걸 아느냐 말하지만 불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만나는 뜨거움도 분명 존재한다. 


한 사람의 존재는 한 세계라고 말했던가. 그 세계는 하나하나 각자 온전히 빛나고 있다는 자각, 그 생을 살아내겠다는 자각. 가만히 들여다보면 인간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지 모르겠다. 온갖 부조리와 세상이 뿜어내는 악취에 지치다가도 빛나는 사람 하나가 불러내는 파장을 생각하면 생은, 순간 너무도 환하게 피어난다. 마음 기대어 살아야 한다. 임명희의 다음을 온 마음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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