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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주씨 Mar 26. 2024

고독한 사람들

토지 4부 2권, 통권 14권


제기랄! 잘난 놈들이나 할 일이제. 잘난 놈들 샣이고 샣있는데 와 우리 겉은 놈들이 맨 앞자리에 나서야 하노 말이다. 이런다고 백정이, 갖바치가 영웅호걸 될 기가. 흥, 우리 생전에 회포할 것 겉지도 않는 일을.’ 470p.


생은 고단하다. 장돌뱅이의 아들로 태어나 산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송관수. 백정의 사위로 얄궂은 운명을 살아가는 일은 마디마디가 고비다. 아들 영광을 찾아 집에 온 강혜숙 모친 얘기에 송관수는 뒷 일을 걱정하며 서둘러 딸 영선을 강쇠아들 휘와 혼례를 올리게 한다. 그간에 해왔던 일을 수포로 돌아가게 할 수 없다.


“잘 처묵고 잘살믄서 유세 부리고 살던 사람들, 그 잘난 사람들 때문에 백성들은 헐벗고 굶주리야 했는데, 이 강산에서 젤 덕을 많이 본 그 잘난 사람들이 내 강산을 팔아묵고 연명을 하는데 백성들은 설 땅조차 없으니 이자는 그 잘난 사람들 처분만 기다리서는 안되는 기라. 내 살길 내가 찾더라고 언제꺼지 백성들은 이렇기만 살아야 하노 말이다.” 466p.


그가 당면한 생은 이 땅에 살아가는 민중, 그 안에서도 가장 약한 존재의 목소리이다. 가장 약해서 나라를 빼앗긴 시절에도 그 약한 위치를 벗어날 수 없다. 독립은 내 나라를 찾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내 목소리를 찾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개맹한 세상’을 살아보고자 하는 의지는 싸워야 할 것이 너무 많다. 내 아들의 설움을 당장은 해결할 수 없지만 아들이 살아갈 세상에 힘을 보태고 싶은 아비의 열망은 ‘소리를 내자, 우리도 사람이다’ 하고 용기를 낸다.


3.1 만세운동 당시 경찰서에서 ‘만세를 불렀심다’ 하는 소리만 내내 반복하던 짝쇠의 말도, 급하게 들이닥친 관수와 사돈이 된 날에도 모여 앉아 다음을 걱정하는 강쇠의 된소리도, 아비의 죄를 내려두고 온전한 한 인간으로 ‘애국자로 세상 끝내는 편이 안 낫겄십니까’ 하는 한복이의 다짐도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생각한 것이다.


나라를 잃었다는 것은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굴레였다. 조찬하, 오가타, 유인실이 동행한 통영행에서 서로의 대화로 오랜 응어리가 터지듯 드러난다. 오가타와 통영 밤거리를 걷다 감정이 동요하듯 쏟아지는 인실의 말, 오가타를 사랑하지만 나라와 민족의 명운을 두고 그를 제대로 사랑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인실의 고독. 명희를 만나고 돌아와 혼란스러운 상태로 오가타에게 쏟아지는 조찬하의 말, 부를 누리고 있지만 그것이 부끄러운 것임을 알고 있는 조찬하의 자기 고백과도 같은 말. 배움은 좀 더 구체적인 언어로 상황을 바라보게 할 뿐이다. 사유는 오히려 한계를 마주한 인간을 극한의 고뇌로 끌고 갈 뿐이다. 누구도 피할 수 없고 누구에게도 온전한 자유를 주지 않는다. 날은 멀고 깜깜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전쟁. 각자의 위치에서 인물들은 멀고 희미한 관념처럼 전쟁을 생각한다. 역사적 사실, 연대기적 사건으로 이야기의 방향을 알고 있지만 계속 어려울 뿐이다. 저 개개인의 생은 다 어떻게 되는 것인가. 다가올 역사적 사건들의 행로를 안다고 해서 저들 생의 방향도 어떻게 부서지고 흘러갈지는 알 수 없다. 확인하기 두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말과 말로 이어지는 생각들이 더 무겁게 다가온다. 개인의 잘못이 아닌 일을 개인이 감당하고 살아내야 한다는 아이러니 앞에 거대한 무력함이 몰려온다. 앞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부채감을 느끼는 순간이다.


‘우리는 모두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도착한 그곳도 저 깊이 모를 창밖의 어둠과 같은 어둠이 있을 뿐일까.’33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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