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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주씨 Mar 27. 2024

말, 말, 말

토지 4부 3권, 통권 15권 

통권 15권, 4부 3권. 어쩐지 어렵다. 등장인물들의 기나긴 독백이 페이지를 넘기는 일이 잦다. 간도협약에 대한 긴 이야기도 이어진다. 말 그대로 통한의 시대, 통한의 역사. 시간을 앞에 두고 견디어 내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각자 안에 거대한 생각의 뿌리를 감추고 산다. 그 시대가 말을 드러낼 수 없었던 시절임을 생각하면 꼭 반어법 같다. 생각도 글도 자유로울 수 없던 시간, 안으로 숨어든 말들을 어떻게 다 숨기고 살아냈을까. 선우형제와 유인성의 대화, 제문식이 병든 조용하를 앞에 두고 쏟아내는 말들, 앞서 통영 거리를 걷던 유인실의 절규와도 같은 기나긴 말들과 통영에서, 또다시 동경에서 이어진 조찬하와 오가타의 대화도 마찬가지다. 박경리 선생님이 저들의 입을 빌어 펼쳐내는 사유의 넓이와 깊이는 쫓아가기 벅차고 힘들고 어렵다. 저 시대의 생이 그러하다고 살아가는 일이 만만찮다고, 나라 잃은 땅의 사람들이 굴욕과 비통함을 어떻게 안으로 삭이며 살아가는가 생각해 보게 된다.     


 “사회 전체가 거대한 에고이즘의 덩어리라는 말은 맞는 말이네. 전폭적인 긍정으로 감상주의에 흐르는 것도 대단히 위험한 일이야. 더더구나 민족주의를 휘두르고 나가는 사람들에겐······ 사회주의자들도 마찬가지야. 민중에게 절망하는 것도 그러하나 큰 기대를 거는 것도 어리석어. 실체를 뚫어보지 않고 하는 일은 결국 붕괴된다.”152p.     


여러 사조들이 쏟아지며 지식인들을 휩쓸고 결국 독립으로 향하는 여러 갈래로 이어졌다는 생각에는 변화가 없다. 실로 그러하기도 했다. 그러나 단편적인 말로 한 문장으로 그냥 쓰기는 쉬우나 그 안에 내가 얼마나 무거운 시간과 말들을 쉽게 판단하고 옮겨두었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무수한 치열했던 시간들을 단편적으로 한 줄로 그러했다고 쓰며 드러나는 것은 나의 세계관이다. 내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한정해 축약해 두고 되짚어가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나. 역사를 꽤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그럼에도 우리 일제 강점기, 근현대사에 대한 배움은 한없이 짧다. 겉핥기 하고 미뤄둔 짧은 배움이 호되게 매를 맞는다. 토지를 읽어내는 시간은 무겁고 때론 가혹하다. 나는 저 시절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단편적인 역사적 사실 몇으로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저 말들을 얼마나 이해하고 내 것으로 내 몸 안에 새겨둘 수 있을까. 숨이 차다. 만주사변 즈음에 선생님이 간도 땅에 얽힌 이야기를 길게 써주셨다.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길게 이어온 그냥 읽기에서 한 걸음 나아가야 한다 싶어 진다. 제대로 알고 기억하고 되새기기를 바라셨을까. 읽는 사람도 이리 고단한 마음이 드는 걸 선생님은 어떻게 버티셨을까. 얼마나 긴 시간 혼자 고독하게 공부하셨을까. 그 무수한 사유들을 어떻게 말로 글자로 기록하셨을까. 한 줄, 한 줄 버티고 밀어내며 기록하신 세월이 이 십 몇 년, 글자로는 다 하지 못할 어려움이 밀려오는 기분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도덕의 차원을 넘어서는 진실도 있을게요.” 

 ‘인간은 누구나 본질적으로 그것을 향해 있지만 실체를 파악할 순 없어. 어느 누구도. 진리다  진실이다 그 흔한 말들, 그러나 진실은 결코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도 없고 발견되는 것도 아닌게야. 그게 바로 인간의 불행인지 모르지.’ 265p.      


시간을, 사유를, 역사를 눈으로 좇으며 숨이 가쁘다. 문장을 되짚어 읽고 인덱스를 붙이고 책을 덮고 돌아서면 나는 저 줄 친 문장들을 다 기억할 수 있을까. 빌려온 말들로 빈칸을 채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면서도 이 생에 오롯이 내 것은 얼마나 되겠는가, 앞 선 배움을 되새김질할 때 문장은 살아있는 존재처럼 반짝이며 별똥별처럼 나를 스치고 사라진다. 토지는 내 삶에도 어떤 전환점이 되는 것만 같다. 스쳐가는 순간에 밀려온 생각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몸으로 지나온 시간이 유의미할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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