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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주씨 Mar 29. 2024

선택

토지 4부 3권, 통권 15권 

도덕적 결벽이라고 해야 할까. 인실의 선택은 홀로 아이를 낳고 떠나는 것이었다.      


“우리는 끝났어요. 절대로 다시 이어져서는 안 됩니다. 아이의 아버지도, 아아의 엄마도 아,  아니어야······ 절대로 몰라야 합니다.”

 흐느껴 운다. 작은 새 한 마리같이 흐느낀다. 75p.     


절대적 사유도, 조국의 독립도, 민족적 자긍심도 사랑 앞에서 오래 갈등했다. 부른 배를 안고 조찬하를 찾아간 유인실. 인실은 찬하가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는 걸 알았다. 생은 때때로 의도치 않게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도 한다. 아이가 생겼다. 오가타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 정도 고뇌의 시간을 버텼다면 아이를 핑계 삼아 어딘가에 뿌리를 내렸을지도 모른다. 유인실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언젠가는 만주로 떠날지도 모른다고, 나라를 위해 무엇이든 내 할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던 인실에서 침략국 일본인을 사랑한다는 건 도저히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일이었다. 감정마저 부정하던 시기를 지나왔으나 선택은 다른 문제였다. 게다가 다급히 경성을 떠나는 선택을 해야 했을 만큼 처녀의 임신은 용납되지 않는 시절이었다. 인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결국 인실은 동경에서 그간에 도움을 준 조찬하에게도 가는 곳을 알리지 않은 채 떠난다.      


모성애나 연민 같은 것, 그런 것은 인실에게 너무나 염치없는 감정이었다. 나락과도 같은 죄의식, 뿌리쳐도 뿌리쳐도 달려드는, 덮치고 누르는 바위 같은 죄의식이 그의 생존을 끊임없이 위협했다. 377p.     

 

인실은 도망치듯 떠나와 온전히 혼자가 되자 감정적 후폭풍을 맞아야만 했다. 떠나온 용정에서 해를 넘기고 나서야 ‘집요한 자신과의 작별(377p.)’에 닿는다. 버리고 왔으나 인실은 떠나지 못했다. 매듭짓지 못한 감정의 격랑은 그토록 거대한 것이었을까.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면 인실의 삶은 경성에서 계속 이어졌을까 생각해 본다. 기예학교 야간부 선생으로 계속 일했을까. 결혼하지 않는 동생의 결심을 존중하는 오빠 유인성의 그늘아래 계속 살았을까. 간절히 바라던 조국 독립에의 헌신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었을까. 그래도 최소한 이토록 다급히, 본인이 선택하지 못하는 방법은 아니었겠지. 여태껏 버텨온 시간과 어떻게 결별했나. 감정은 말 그대로 사치였었나. 아이마저 버리고 떠나온 시간, 단순히 한 사람과의 이별이 아니었다.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신념과 내 나라의 독립을 위한 마침표이기도 했다.     

 

“형체도 남기지 않는 파괴, 그런 방법이 있다는 것이 위안이에요. 어느 곳 어느 때든 그것만은 저의 권리고 자유니까요.” 79p.     


‘나’를 인식하고 ‘자유’를 추구하는 개별적 인간으로 존중받기에 시대는 암울하고 가혹했다. 배움이라는 것이 누구에게나 희망과 꿈이 되는 시절이 아니었다. 식민지 사람들, 그 중에서도 여자가 두 발 디디고 살기는 쉽지 않았다. 신여성들의 생은 결혼 유무와 결혼생활의 질로 확정되고 보호받을 수 있었다. 보호색도 지니지 못한 여자가 떠나 올 결심을 하고, 홀로 나서기까지 여태 몸에 익숙했던 사회적 관념마저도 인실에게는 스스로를 비판하고 잣대를 들이대는 이중의 굴레였을 테다. 그리고 팔 년의 세월, 생각지도 못한 하얼빈에서 인실은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한 듯하다. 


토지를 읽으며 여러 여자들을 만난다. 남자의 시선아래 적당히 잘 만들어낸 피조물 같은 여자가 아닌, 당대의 생생한 살아있는 여자들.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생을 살아갈지 치열하게 사유하고 선택한다. 하나, 하나 이름 부르듯 머릿속을 스친다. 여자들이 살아가는 시대는 불온하나 나아갈 방향을 인식하고, 선택하고, 행동한다. 생이 그러하듯 모두가 행복하거나 모두가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기를 멈추지 않는 여자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봉건적 테두리를 벗어나 새 시대를 살아가는 모습만으로도 희망을 본다. 허정윤에게 버림받았지만 새로이 살아갈 결심을 하는 숙이가, 통영에서의 삶이 녹록지 않지만 그래도 혼자 버텨내고 있는 임명희가, 고통스러운 결별의 시간을 지나온 유인실이 각자의 생을 스스로 살아내기를 부디, 그래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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