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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주씨 Apr 02. 2024

감사와 위로

토지 5부 1권, 통권 16권 

5부를 시작하며 남기고 싶은 한마디가 뭐가 있을까. 작년 우연히 토지 읽기를 시작하고, 톡토로들과 함께하는 토지 줌 이야기모임도 생기고, 덕분에 토지문화재단의 토지 읽기도 시작했다. 작년 한 해는 토지로 충만한 한 해였다. 작년은 이러저러한 일이 겹쳐져 개인적으로 편하지 못했던 시간이었다. 처음엔 도피처럼, 나중에는 위로받으며 토지 속으로 깊게 걸어 들어갔다. 갈피갈피 선생님이 숨겨두신 마음은 이런 것이었을까 혼자 넘겨짚으며, 그래도 생은 희망을 품고 있어 아름답구나 그러니 나도 힘내서 살자 생각을 하기도 했다.      


작년 친구들과 토지 읽기를 시작하며 중고 책으로 토지 전권을 샀다. 매번 도서관에 다녀오려니 출퇴근 동선과 어긋나 어려울 것 같았다. 새 책으로 사고 싶었지만 현금사정이 조금 어려웠다. 나중에 새로 나온 토지 새 장정은 진짜 좀 탐이 나더라. 유일하게 중고 책을 구하지 못한 8권만 새 책이다. 인터넷 서점의 중고책방 한 지점에서 몇 권씩, 중고 책 판매하시는 분께 몇 권씩 그렇게 얼기설기한 내 토지가 완성되었다. 운 좋게도 책 상태가 좋아서 거의 새 책이나 다름없었다. 16권부터 20권까지 마지막 5부는 책등이 하늘색으로 바래있었다. 볕바른 자리 누군가의 책장에서 오래 있었나 보다. 괜한 의미를 부여하듯, 시간이 마지막에 닿으면 개운하게 푸르러지나 그런 생각도 해보고. 

     

토지 일주일 방학 후 연휴의 마지막 날 5부 읽기를 시작했다. 5부는 호흡이 길어졌다. 여러 장으로 구성되었던 지난 4부까지와 달리 5부 1권은 전체 5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낯섦으로 시작한다. 흘러온 세월만큼 인물의 성장과 변화도 도드라진다. 중년이 된 홍이, 형평사 운동을 하고 부산으로 만주로 넓고 은밀하게 활동해 오던 송관수의 허망한 죽음, 아들 영광의 후회, 통영에서 서울로 돌아와 유치원을 운영하는 임명희, 그리고 어른으로 자란 양현과 손주를 본 길상과 서희. 묵묵히 읽어온 시간 동안 수많은 죽음과 만나고 새로운 다음 세대의 시작을 보았다. 책 표지 날개 선생님 연보를 괜히 한 번 더 읽어본다. 69년 9월에 시작하신 연재를 94년에 완성하셨다. 5부를 쓰신 시간은 선생님 연세 얼마쯤이셨을까. 사십 대의 선생님이 환갑도 넘어서는 세월, 아이가 태어났다면 성인으로 자랄 동안의 시간, 그 묵묵함을 생각하면 토지 속 인물들의 살아감, 나아감이 새삼 위대하다. 읽기만 하는데도 지쳐서 숨이 차던 날을 생각해 본다. 진짜 어떻게 버텨오셨을까. 마음 준 인물들의 마지막을 홀로 묵묵히 지키며 그 어둠을 어떻게 버티셨을까.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사와 미안함이 동시에 밀려오고 쓸려나갔다.      


“우리가 이 순간 바보같이, 미치광이가 되어 술을 마시고 있지만, 또 손 하나 발 하나 내밀 수 없는 철저하게 무력한 상태에 놓여 있지만 우리는 항복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민족주의는 결국 자아에 대한 방어요 민족의 존엄은 결국 내 자신의 존엄이기 때문이다. 다 빼앗기고 벌거숭이 되어도 우리는 항복하면 안 돼, 내가 왜 이런 얘기를 하는고 하니, 얼마 전에.” 161p.      


서의돈의 말을 빌어 나에게 닿는 강력한 선생님의 마음을 읽는다. 수많은 인물들이 스쳐가며 나를 향해 외치는 마음들을 읽는다. 함부로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단단하게 버텨 사람이 되자 순간순간 그렇게 나를 스쳐갔던 생각들이 시간을 두고 내 몸에 쌓여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그래도 걸어왔구나 나는 토지에, 선생님께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왔는지.       

 

······ 한이야 후회하든 아니하든, 원하든 원치 않든, 모르는 곳에서 생명과 더불어, 내가 모르는 곳, 사람 모두가 알 수 없는 곳에서 온 생명의 응어리다. 밀쳐도 싸워도 끌어안고 울어도, 생명과 함께 어디서 그것이 왔을꼬? 배고파서 외롭고 헐벗어서 외롭고 억울하여 외롭고 병들어서 외롭고 늙어서 외롭고 이별하여 외롭고 혼자 떠나는 황천길이 외롭고 늙어서 외롭고 이별하여 외롭고 혼자 떠나는 황천길이 이롭고 죽어서 어디로 가며 저 무수한 밤하늘의 별같이 혼자 떠도는 영혼, 그게 다 한이지 뭐겠나. 참으로 생사가 모두 한이로다······ 198p.      


위로에 기대어 기어이 그렇게 흘러흘러 또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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