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경주씨 Mar 25. 2024

그자의 별명은 코니

아무래도 미쳤다 싶었던 날 이후로 각성한 듯 진짜 그자가 좋아졌다.

살금살금 마음이 풀어지던 차에 꽃이 피던 날 술기운에 덥석 아무래도 손을 잡은 것 같은데 꽐라라 기억이 없다. 나만 꽐라였던 건 아니었더라고.


원래 전공이 짝사랑이다.

그치만 뭔가를 시작하기도 그렇다고 가만히 두고 보기도 쉽지 않은 내 나이 마흔하나. 나이 같은거 무슨 상관이야 싶은데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쓰이고 만다. 그래 뭐 그냥 술친구 밥친구 하자. 부담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은데, 글쎄 그게 점점 보고 싶어 지더라고. 십 년이나 연애를 쉰 머리는 세포재생에 힘을 쏟아도 버벅거렸다. 아마도 내가 질척거리는 게 다 보였을 텐데 그자는 싫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니면 모르고 싶었거나.


친구들에게 그자의 이름을 얘기해 주기 전 공식풀네임은 '시청 앞 그자'였다. 말 그대로 시청 앞에 사는 사람인데 줄여서 그자라고 불렀다. 뭔가 아무 사이도 아닌 사람의 이름을 얘기해서 뭐하나 싶었다. 이름을 전하면 어쩐지 공식화 되어버리는 기분에 솔직히 피하고 싶기도 했다. 친구 동생이 보지 않았다면 얘기를 하지도 않았을테지만 이미 등장한 사람이니까. 그자를 부를 말은 필요하니까.

 그자. 밥친구라 부르는 것보다 한발 나아간 호칭이었지만 친구들 앞에서는 점잖게 아니야 그냥 밥 먹는 사이야를 고수했다. 친구 하나는 아니라고 촉이 그게 아니라고 계속 얘기했지만 속으로는 좋으면서 점잖게 그저 아니라고 했다. 세상 유치한데 좋았다.


사실 일이 좀 많이 힘들 때였다. 정신줄 붙잡고 매일매일을 버티기가 미션일정도로 상황이 어려웠다. 그자를 만나면 그 생각이 싸악 사라지고 그저 재밌었다. 아니야 하던 걸 혼자 인정하고 나니 약간 뽕 맞은 기분이 이럴까 싶을 정도로 급속히 그자가 좋아졌다.


그 사이 코로나 상황은 점점 심해졌다.

코로나가 심상치가 않아요. 조용하게 술이나 한 잔 할까요?

코로나가 심상치가 않아요. 조용하게 저녁이나 먹을까요?


빤한 핑계를 대고 부르면 그자는 그러자 했다. 주거니 받거니 없는 일도 만들어서 그렇게 술 먹고 밥 먹고 날은 점점 초록이 짙어졌다.


연두색이 지천으로 환장하게 옷을 갈아입던 어느 주말 퇴근길에 카톡을 보냈다.

동그랗고 예쁜 거 보러 안 갈래요? 어딘지도 모르고 콜 하는 그자를 태우고 간 곳은 경주 대릉원이다.

대릉원은 원래 언제 가도 한적해서 그냥저냥 느릿느릿 걸어 다니기 좋은 곳이었다. (코로나로 해외여행이 어려워지자 이제는 포토존이 있을 정도로 붐빈다) 주로 서울에서 살아 부산에서 경주까지 거리 감각이 없던 그자는 경주를 간다고?? 하며 눈이 커졌는데 가까워서 놀라는 눈치였다. 뭐 어쨌든 날 좋고 차도 쭉쭉 빠지는 토요일이었다. 경주는 스타벅스 경주컵을 사러 경주까지 간다 드립을 치며 그렇게 경주까지 갔다.


대릉원을 한 바퀴 돌고 뭔가 아쉬워 해지는 감은사지 탑까지 보고 나서 어두운 고속도로를 밟고 부산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컴컴한 고속도로를 지나며 저녁을 뭘 좀 먹어보나 궁리를 하다 문득, 같은 동네에 살면 참 좋았겠다고 3대가 덕을 쌓아야 가질 수 있다는 동네술친구는 유니콘이라던데 진짜 어려운 것 같다고 실없는 소리를 하고 웃었다. 사실 그자는 서로 알기 전에 우리 동네에 살다 처음으로 얼굴 본 즈음에 시청으로 이사를 갔다. 모임 뒷풀이 자리에서 얘기를 듣고 아이고 동네 분인데 만나자 마자 이사를 가시네요 했었다.


"제가 유니콘 하고 있잖아요."


어우 심장 터지겠네;;;;; 

어두운 고속도로를 달리는 상황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아마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을 것 같다. 우리 동네 스페인식당 비바라초에서 같이 와인을 마시고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그자는 돌아갔다.


친구들 단톡에 그자의 유니콘 발언을 물어다 나르는 순간 친구들은 몹시 즐거워했다. 실장님은 ‘코니’라고 그자의 별명을 지어주었다. 아 진짜 뭔가 되게 민망한데 또 좋더라. 슬슬 아무래도 그자가 좋은 것 같다고 하자 친구들은 그럴 줄 알았다 하며 더 즐거워했다. 안동댁은 호구조사를 칼같이 하려다 육아로 바빠 설렁설렁 넘어간다 했고, 휘는 연애소설 읽는 것 같다며 다음 회차는 어찌 되냐 물었었다.


반짝반짝 설레는 마음이 비타민처럼 일상에 단비 같았다. 좋아하는 마음 그 자체로 참 설렜다.


이전 04화 20200328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