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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주씨 Mar 18. 2024

20200328

핸드폰 카메라는 모든 것을 기억한다

운전한 이후로 어지간해선 택시를 안 탄다. 이상하게 멀미가 난다. 차가 있으면 아예 술을 마시지 않는다. 어디서든 지켜지는 철칙이었다. 거기다 술을 마시고 택시를 타면 백 프로 멀미한다. 그래서 어지간해선 우리 동네에서 술을 마시거나 친구네 동네서 술을 마시면 친구 집에서 자고 온다.


벚꽃이 흐드러지는 날이었다.

토요일이었고 낮잠 자고 일어나 무료했을 거다.


우리 술 마실까요?

누가 먼저 술 마실래 했는지 모르겠지만 여튼 급하게 술약속이 생겼다.


그런데 어지간해선  타지 않는 택시를 타고 그자와 술 마시러 나서는 길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살짝 미쳤나 싶었다. 내가 던지는 개드립을 날름 받아쳐 그럴싸한 대답을 해주는 그자와의 술자리는 재미났다. 재밌다고 토요일 저녁에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택시를 타고 술을 마시러 나가다니!! 출발하면서 이미 기분이 이상했다.


벚꽃이 흐드러지는 날이었다.

택시에서 내려서 위를 올려다 봤다. 달이 어쩜 이렇게 가까이 떴나 착각할만큼 가로등이 선명했다.

가로등을 둘러싸고 가득 핀 벚꽃을 보며 설마 설레는 건가 생각을 했다. 어쩐지 말랑해지는 마음을 다독이며 머리 위로 한껏 손을 뻗어 달같은 가로등과 둥글게 피어난 벚꽃을 찍었다.

문득, 불쑥 뜬금없이 이 순간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

미쳤나?

설마 진짜 설마??


나 분명 남자도 연애도 다 시들했는데 갑자기 왜 이러나.

봄밤에 꽃이 펴서 이럴까. 이러지 말어라, 꽃 잎 좀 흩날린다고 그게 뭐 대수라고.

피부 밑을 흐르는 뭔가 낯선 감각이 너무 오랜만이라 당황했다. 앞뒤없이 불쑥 치고 나오는 감각에 택시를 내려서며 휘청거리던 기분이 딱 맞게 짜맞춰진 순서처럼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다. 

나 설마 이 사람이 좋은 걸까?


아이고, 미쳤나 보다!!!


별나게 술이 맛있는 날이 있다. 그날이 그랬다. 대화는 빈틈없이 재미나고 술은 맛있고 심지어 머리 위로 달을 올려다보듯 꽃을 바라보다 앞뒤없이 설레버린 날이었으니 술은 평소보다 훨씬 더더더 날름날름 잘도 들어갔겠지. 인과따위 무슨 소용인가. 갑자기 쏟아진 감정은 얕고 넓은 내 바닥을 채우고도 넘친다. 재미를 감정으로 오해한건가? 눈 앞에 앉은 그자가 새삼스럽고 무던한척 마시는 술에 지지않으려고 무수히 볼을 꼬집는 심정으로 술을 마셨다. 책을 넘기다 갑자기 반으로 접어 책갈피처럼 접어둔 자리는 페이지를 펴고도 그 자국이 그대로 남는다. 내 모습이 어떻게 비칠까 자꾸 생각했다. 나는 지금 이 감정과 상태가 겉으로 드러날까 신경이 곤두서 있다. 함부로 들키고 싶지 않다. 무던한척 자주 웃었다. 술을 꽤 잘 마신다. 어지간해선 함부로 흐릿해지지 않는다. 

그런데 말 그대로 꽐라가 됐다.


택시를 타고 집에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멀미가 나 두어 번 차를 세웠었나. 핸드폰에 사심가득한 꽃 사진이 남았다.


벚꽃이 흐드러진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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