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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로 Apr 22. 2024

조각 피자

푸드코트에서 팔던 딱딱한 조각피자

"혹시, 안에 계시나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모르는 여자가 들릴 듯 말 듯 문을 두드렸다.


티브이를 보고 있던 나는 아빠를 쳐다봤다.


아빠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현관으로 나갔다.


"뭐요, 무슨 일이요"


금방이라도 한 대 칠 것처럼 공격적인 아빠의 말투.


"아, 다름이 아니라 정산을 좀 하려고 하는데요"


쩌렁쩌렁 울리는 아빠의 욕지거리가 동네를 울린다.

40권 정도 되는 전래동화 전집, 어떻게 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대금을 받으러 온 사람들이었다.


왜 그 사람들이 오히려 욕을 먹어야 하는지는 잘 몰랐지만, 아빠가 큰 소리를 내면 나는 심장이 빨리 뛰었다.

단지 이 상황이 빠르게 끝났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닫히는게 상황이 끝났다는 신호였다.

씩씩거리면서 들어오는 아빠를 못 본 척하며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티브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 즈음, 사달라고 한 적도 없는 전래동화나, 과학과 관련된 아동서적들이 집안을 점점 채우기 시작했다.


간혹 저런 게 왜 필요하냐고 새벽에 싸움이 일어나는 걸로 봐서는 어머니의 뜻이 아니었을까.


부모는 자신이 못 이룬 뜻을 자식에게 반영시킨다고 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것은 못다 한 한을 대신해서 풀려고 한다기보다는 자기네들처럼 살면 자식이 어떻게 될지 뻔하기 때문일지도.


그리고 그 책들의 비용을 내는 것도 어머니의 몫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꾸역꾸역 재미도 없는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려는 듯, 아버지의 시비는 이유가 없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목성, 토성 같은 지구 밖의 행성들이 컬러로 실려져 있는 멋진 책이었다.

목성의 부피가 지구의 1,400배라고 하는데 나는 이 집을 벗어나는 것도 너무 멀게만 느껴지네.

그럼 목성은 얼마나 큰 걸까. 다행이다. 목성은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이라서.


비가 세차게 오던 날, 꿉꿉한 느낌에 눈을 뜨고 일어나니 바닥에 깔아 두었던 이불들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꽤나 많은 비가 왔던 날이라, 반지하였던 우리 집이 침수되었던 것이다.


부모님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곳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해. 그 밤이 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나는 나만 사는 섬에 살고 있다.

역시 지구는 아름다운 행성이었네.




"아들, 피자 먹으러 갈래?"


어머니가 퉁퉁 부은 눈을 꿈뻑이며 말했다.

보통 외출 전에는 항상 화장하는데 시간을 많이 쏟아 한 소리 듣곤 했었던 것 같은데 곧바로 서둘러 나갈 채비를 하는 엄마를 뒤쫓아 바깥으로 나섰다.


집 근처에는 아울렛이 하나 있었다.

친구들과 학교가 끝나면 책을 읽거나 마트구경을 하거나 하는.


그 곳의 5층은 푸드코트였다.


가끔 옷을 사러 아울렛에 오는 날이면 한 조각에 2천 원, 2천5백 원씩 파는 조각피자가 그렇게 맛있어 보였다.

근데 피자는 생일 때나 되어야 맛볼 수 있는 음식이라 아 여기서 파는 피자는 이런 냄새구나, 하고 생각만 했었다.


어머니는 아울렛으로 향하는 동안 내 손을 꼭 잡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나서 흥얼흥얼 거리는 내 마음을 모르는지 어머니의 걸음은 빨라도 너무 빨랐다.


그리고 어머니는 나를 옥상으로 데리고 갔다.


아마 겨울이었을 것이다.

바람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볼따귀를 때려 따가울 지경이었다.

어머니는 건물 옥상 한가운데서 내 손을 잡고 가만히, 바람을 맞으며 훌쩍거렸다.


눈물을 흘리면 추울 텐데, 걱정이 되었지만 왠지 아무 말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하늘은 흐렸고, 옥상엔 아무도 없었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천호동의 모습이다.

근처엔 환락가가 있고 저 시장 안에는 호떡을 파는 상냥한 할머니가 오늘도 호떡을 굽고 있을 것이다.


우리 집은 어디쯤이더라. 그런데 너무 춥다.


"엄마, 나 추워"


엄마가 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렸다.


"아들, 엄마도 춥다 피자 먹으러 가자"


그날, 나는 푸드코트의 피자를 처음 맛보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딱딱하고 차갑고, 짰다.

그냥 그만 먹고 싶었다.


그렇게 그날 어머니도 뭔가를 포기하려 했던 게 아닌가 한다.


기대만 잔뜩 했던 피자의 맛이 먹고 나니 별로였던 것처럼, 어머니의 인생도 살아보니 별로였으려나.


지금은 그 피자의 맛보다, 그 맛없는 피자를 두 조각씩이나 먹어 치웠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엄마가 좀 배고팠어"


배시시 웃는 그녀의 얼굴이 피자 꼬다리처럼 바싹 말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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