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 없이 끓여진 냄비에 담긴 오뚜기 카레
"이제부터 엄마라고 해"
아버지는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했다.
"응"
엄마라고 부르는 몇 번째 사람이었더라. 숱하게 지나쳐 온 많은 여자들의 얼굴이 머리를 스쳤지만 일단 지금부터 당분간 엄마는 이 사람인가 보다, 하고 대답했다.
벽지가 여기저기 뜯어져 있는 반지하방과는 전혀 맞지 않게 화사하고 멋진 옷을 입고 있는 가녀린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짙은 화장에서 풍겨오는 싸구려 분냄새, 어떻게 저렇게까지 빨간색 루주가 나올 수 있지 싶을 정도로 시뻘겋던 입술.
그 입술은 뭔가를 말하려는 듯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띠고 씰룩, 씰룩거리고 있었다.
그것이 지금껏 나의 곁을 지켜주고 있는 새엄마, 어머니였다.
20대 중반. 내가 그 나이대로 돌아가면 어머니와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아직 자신이 없다.
어머니는 입이 걸었다.
간지럼을 많이 타던 나는 어머니가 씻겨줄 때 가만히 있지 못했고, 그럴 때마다 "썅!" 하고 큰 소리로 욕을 내뱉었다.
그러면 아버지가 달려와 니 새끼 아니라고 욕하지 말라며 다그치고 이년 저년 하며 큰 소리가 시작되었다.
합리적인 판단이 안 되는 나이였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아빠는 더 심한 말도 하지 않냐며 대들었다.
그렇게 되면 아버지의 주먹은 나를 향했다.
자기 새끼인데 마구 패는 아버지, 자기 새끼는 아닌데 길러주며 보듬어주는 어머니.
뭐가 맞고 뭐가 틀릴까. 아버지는 틀리고 어머니는 맞는 것이라고 생각한들 달라지는 점이 있을까.
새벽 늦게까지 싸우며 때리고 맞는 소리가 들리는 날이면 불 꺼진 방안에 누워 천장의 무늬를 보며 동물들을 찾았다.
강아지, 고양이, 저건 공룡 같은데. 너네들은 때리는 아빠는 없지?
처음 봤을 때, 너무 안돼보였던 너를 지켜주고 싶었어.
라고 어머니가 말했던 것은 진심이었을까.
그녀는 아버지를 사랑해서 나를 참은 걸까, 나를 지켜주기 위해 아버지를 참은 걸까.
솔직한 대답을 듣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그냥 문득 궁금하다.
아버지는 끝까지 그렇다 할 정기적인 수입이 없었다.
아직도 그때에 무슨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는지 말해주지는 않지만 오 천 원이 없어 햄버거 세트를 사줄 수 없다며 화를 내던 어머니의 모습은 아직 기억한다.
처음, 어머니가 일을 나가보겠다고 말했을 때의 아버지의 반응이 생생하다.
마치 들어선 안될 것 같은 말을 들은 표정을 짓다가 바로 화를 내며 이 집의 가장은 나야,라고 말하던.
그 가장이라는 타이틀은 스스로 생각했던 유일하게 자부심이 있는 타이틀이 아니었나 싶다.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궁핍해지자,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하루에 세 가지의 일을 하게 되었고, 하교 후의 나의 끼니를 챙기는 것도 어머니의 몫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할 수 있는 음식은 카레 말고는 없었나보다.
자취도 안 해 본 어린 나이. 느린 걸음으로 장을 보다가 이거면 되겠다, 싶었을까.
익힌 당근을 씹으면 헛구역질을 해대서 몇 대씩 맞던 나의 모습을 기억한 어머니의 카레에는 당근이 없었다. 그리고 그 카레는, 마지막 한입까지 너무 맛있었다.
아침 7시에 나가 밤 12시가 다 되어 들어온 어머니는 냄비를 열어 남은 카레가 얼마나 있는지 확인하고는 선 채로 카레를 퍼먹곤 잠에 들었다.
아빠, 난 카레가 제일 맛있어.
왜 맨날 카레만 쳐 멕이냐고 소리를 지르는 아버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그냥.. 내버려 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