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도마에 반죽한 면으로 만든 사카린 국수
"내 말 잘 들어"
빨래를 널던 여자가 입을 떼었다.
여덟 평 남짓 되는 퀴퀴하고 어두운 반지하의 단칸방.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빨래를 하는 것이 더 냄새가 나는 게 아닌가 싶지만 바깥에서 묻혀온 흙먼지를 그냥 털어 다시 입히기에는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혹시 누가, 불쌍하다고 하면 절대 왜라고 하면 안 돼. 알겠지?"
팍, 팍 하며 큰 소리로 빨래를 연신 터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응"
다섯 살이었던 나는 엄마가 하는 말은 잘 들어야 했다.
그러라니까, 그래야겠지.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그 여자는 없었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엄마, 엄마, 하면서 찾았을지도 모르겠지.
분명히 큰 일이었을 것인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그 여자였어도 자식 둘을 버리고 집을 떠날 수 있었을까.
하긴, 아무렇지 않게 주먹을 휘두르며 험한 말을 내뱉는 남편과 사는 삶이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들 눈엔 내가 불쌍해 보였을 수도 있겠다,
싶다.
아버지가 매일같이 술에 절어 집안 물건들을 전부 깨부수고, 엄마는 도망가 버린 집의 꼬질꼬질한 5살짜리 남자애.
그런데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겠다,
싶다.
그런 곳에서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아버지야 배신감에 이년 저년 하면서 욕을 하고 흥신소까지 고용해 그 여자를 찾아다녔다.
나는, 기억나는 것은 저 골방에서의 짧은 대화가 전부이다.
밉지도 않고, 보고 싶지도 않다.
그냥 한 가지 고마운 것은 나에게 버림받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게 해 줬다는 것.
나중에 커서 우연히 그때 내 이름으로 가입된 통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래도 한 생명을 낳으려고 했던, 낳아서 기르려고 했던 그녀가
앞으로 이 핏덩이를 어떻게 데리고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계획이 어느 정도는 있었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오만 원이었던가, 십만 원이었던가. 그 푼돈에 이자도 참 많이 붙어있었다.
그녀가 다섯 살 때 배웠던 것은 뭘까?
그리고 지금은 그때의 기억에 대해 어떻게 떠올리고 있을까.
만나서 말해주고 싶진 않지만, 잘했다, 라고 말해주고 싶다.
어설픈 모성애에 감정 휘둘리지 않고 떠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길 잘했다. 라고.
7살이 되던 해였다.
아버지는 또다시 교도소에, 새엄마는 돈을 벌러 나가는 사이 나는 전라도 할머니 집에 맡겨졌다.
똥이 가득 쌓여있는 푸세식 화장실에서 노란 전화번호부를 뜯어 부드럽게 만들어 똥을 닦던 시절.
근처에 슈퍼 하나 없고 드넓은 논과 밭만 있었던 전라도 벌교의 어느 깡촌 시골집.
할머니는 나를 보며 짠한 것, 짠한 것, 하며 매일 같이 눈물을 흘리셨으나 저녁 10시마다 하는 새엄마와의 통화는 그렇게도 싫어했다.
"그년이 뭐 라디?"
전화를 끊으면 작은 몸통에서 어쩜 그리 큰 소리가 나오는지, 잠깐 움찔했었다.
그래도 어린 나이라 단것을 좋아했기에, 나는 할머니가 끓여주는 사카린 국수를 먹는 날을 매일같이 기다렸다.
얼마나 됐는지도 모를 나무 도마를 꺼내 밀가루에 물을 대충 섞어 반죽을 하면 아, 오늘은 맛있는 거 먹는 날이구나! 생각했다.
질척거리는 국물에 김이 폴폴 나는 그 국수에는 흔한 계란 고명 한 줄 들어가 있지 않았지만 그냥 그 단맛이 좋았다.
할머니가 솔솔 뿌리던, 뉴-슈가라고 써져 있는 그 노란 봉지가 사카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은 20살이 넘어서였다.
다시 서울로 돌아가던 날.
그런 걸 왜 애한테 먹이냐고, 참고 참던 새엄마가 처음으로 바락하고 대들었다.
나중에나 되어서야 말 할 수 있었다.
나는 거기서는 그게 제일 맛있었어, 엄마.
그래도 뭔가를 기대할 수 있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