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를 신혼이라고 봐야 할까요. 정의 내리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명확한 건 없습니다. 다만 신혼부부 대출을 알아볼 때 봤더니 신혼부부 대출을 받을 수 있는 기준은 혼인신고 후 7년 이내였습니다. 그 기준에 따르면 나는 아직 신혼 생활을 하고 있는 결혼 뜨내기(?)입니다. 가을이 되면 결혼한 지 4년이 되거든요.
결혼 전에는 지금의 배우자와 5년 동안 연애를 했습니다. 도합 9년간을 만났죠. 물론 함께한 시간만이 관계의 중요한 가치나 지표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근 10년을 만나고 있으니 우리가 만나온 날들을 세면서 가끔 새삼스레 우리 꽤 잘 살고 있구나 합니다.
아직 결혼해 같이 산 기간보다 연애한 기간이 더 길어서인지 연애의 여흥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부부의 기념일을 꼽자면 첫 번째가 연애를 시작한 날이고 두 번째가 결혼기념일입니다. 상반기에 연애 시작 기념일, 하반기에 결혼기념일을 챙기면 1년이 끝납니다.
기념을 한다고 하지만 거하게 무언가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평소에 먹고 싶었던 음식을 먹으면서 와인을 한 잔 마시거나 근처에 미리 봐 둔 가보고 싶었던 식당을 가거나 합니다. 기분이 내키고 서로의 주머니 사정이 좋으면 약소하게나마 서로 선물을 주고받기도 하고요. 배우자는 꼭 잊지않고 편지를 써주기도 합니다.
올봄에는 집 근처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갔습니다. 차를 타고 10분에서 15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있는 식당이었는데 산 초입쯤에 있어 한적하고 식당 주변 경치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어둑해지는 와중에 조명을 환화게 켜놓은 식당이 썩 좋아 보였습니다. 바로 맞은편에는 이제 막 문을 연 카페도 있어서 저녁을 먹고 카페에도 가볼까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식당에 들어가 메뉴를 보니까 먹고 싶은 게 많았습니다. 배가 큰 편도 아니면서 기념일이라는 핑계로 음식을 세 가지나 시켰습니다. 네, 다섯 가지를 시키고 싶었는데 참았어요. 까르보나라 하나에 고르곤졸라 하나, 카레가 들어간 볶음밥 하나. 부부는 평소에도 서로 수다를 떠는 것을 좋아하는 편인데 분위기도 좋고 음식도 맛있고 기념일이겠다 마음도 뿌듯하고 하니 이야기하면서 음식을 먹으니까 음식이 술술 넘어가더라고요. 와중에 거나하게 시킨 음식이 아까워서 좀 과하게 먹기는 했습니다.
명색이 기념일인데 바로 돌아가기 아쉬워 또 맞은편 카페에 들렀습니다. 아직 완전히 문을 연 것은 아니라서 메뉴가 한정적이라고 했습니다. 나와 배우자는 둘 다 커피의 맛을 잘 모릅니다. 근데 그 날따라 이유는 모르겠는데 고아하게 커피를 홀짝여 보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맛도 모르면서 저는 아메리카노 한 잔, 배우자는 카페모카 한 잔을 시켰습니다. 창가에 앉아서 서로 마주 보고 그간의 소회를 풀었습니다. 우리가 만난 지가 벌써 9년이네, 처음 만났을 때 우리가 결혼할 줄 누가 알았을까? 나는 알았는데? 뻥 좀 치지 마. 매 기념일마다 되풀이하는 뻔한 레퍼토리인데 그래도 이런 이야기를 하며 지난날을 되짚으면 재미가 있으니까요.
배우자가 커피를 두 모금쯤 마시고 잔을 천천히 내려놓더니 나를 지긋이 보았습니다. 아주 침착하고 진중한 목소리로
여보, 내 배에서 천둥이 쳐.
그러더라고요. 저는 과장 좀 보태서 앉아 있던 자리에서 펄쩍 뛰었습니다. 뭐? 괜찮아? 하고 되물으니까 괜찮대요. 나는 이제 그만 집에 가자고 했거든요. 배우자는 근데 한사코 괜찮다고 했습니다. 화장실을 가라니까 또 싫대요. 카페가 너무 조용하고 이제 막 문을 연 가게라 왜 그러는지 이해는 됐습니다. 배우자가 배탈이 자주 나는 편이라서 본인이 괜찮다고 하니 그럭저럭 견딜 만 한가보다 했죠. 그러고나서 몇 분쯤이 흘렀나 갑자기 막걸리 마시듯이 카페모카를 쭉 들이켰습니다. 나는 쓰고 셔서 거의 입도 대지 않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일어나자는 사인인 걸 알아차렸거든요.
내가 운전을 한다고 하니 한사코 됐다고 했습니다. 급하고 절박한 사람이 하는 게 낫겠다 싶어 그냥 운전을 하게 뒀습니다. 마음은 빨리 가고 싶은데, 머피의 법칙 있잖아요. 신호마다 족족 걸리게 되는. 늦어도 15분인 거리가 1시간은 가야 할 것처럼 느껴지고. 배우자는 이제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기까지 했습니다. 다른 지방 사투리를 막 섞어가면서 배가 너무 아프다고 성화였습니다. 맘이 안쓰러워서 신호에 걸려 죽으려고 하는 배우자의 팔에 손을 얹었더니
돈터치 미!!!!!!
하고 엄청 앙칼지게 소리 지르면서 새된 소리를 내더라고요. 처음엔 무슨 소린지도 못 알아 들었습니다. 사투리를 쓰다 못해 갑자기 영어로 자기 건들지 말라고 소리를 치는 모습을 보니까 너무 웃겼습니다. 소리쳐놓고 자기도 민망한지 흐흐 웃다가 배가 너무 아프다고 미칠 것 같다고 난리였어요. 남은 아파 죽겠는데 나는 왜 이렇게 웃기는지. 웃음을 못 참겠더라고요. 머피의 법칙은 끝나지 않아 하필 또 엘리베이터는 저기 고층에 있어서 엘리베이터 내려오길 기다리며 배우자는 몸을 베베 꼬면서 거의 춤을 추는 지경이었습니다. 이 좋은 날. 좋은 분위기 좀 내보겠다고. 까르보나라에 카페모카까지 안 먹던 걸 과식을 하니까 그렇게 된 건데. 이 상황이 너무 웃겼어요. 재밌고.
한바탕 거사를 치르고 개운한 얼굴로 나온 배우자를 기념일인데 마지막 마무리가 이래서 좀 추접스럽게 기억되겠다고 놀리니까 머쓱하게 웃었습니다. 그냥 이런 평범하고 소소한 해프닝도 즐거운 걸 보면 아직은 신혼부부인가 보다 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