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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키뉴 Oct 25. 2024

입 겐세이

외국어를 배울 때 임하는 자세, 이건 사람마다 다르다. 다른 사람이니까, 그 자세도 뭐 다르겠지. 나는 어떻냐면, 외국어를 배울 때 욕은 가능하면 안 배우려 한다. 배울 생각이 없달까. 누가 내게 욕을 하는 듯해도, 그게 욕이었는지, 욕이라면 무슨 욕인 것인지, 뭐 그런 걸 따지려고 하지도 않는다. 욕을 내가 듣지 않고 흘려버린다면, 그건 과연 욕이 될 수 있는가. 칭찬을 칭찬으로 듣지 않는다면 칭찬이 아니게 되듯.  미영 씨는 몸매가 좋네요, 허허.


한국말로 된 욕이라도 기분이 나쁘고 그런 건 아니다. 오히려, 나한테 상처 주려고 하는 그 모습이 가여워 보인달까. 우리 철수, 화가 많이 났구나. 넌 내가 기분이 나빴으면 좋겠구나. 이런 태도는 축구에서도 드러나는 편이다. 그게 어떤 말이든, 점잖은 말이 안 나간다는 건 지금 이기고 싶다는 뜻, 아니면 경기가 잘 안 풀려 짜증난다는 뜻, 그런 것들에 다름 아니라 볼 수 있으니까. 우리 엄마를 두고 하는 욕이 상대 입에서 나왔다? 그건 내가 아주 잘하고 있다는 뜻이지. 극찬, 감사하고요.


축구에서 상대를 무력화시키는 데는 힘이 중요하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일 것이다. 거친 태클 한 번으로 상대 선수를 다치게 할 수도 있고, 겁 먹고 소극적으로 움직이게 할 수도 있으니까. 그게 핵심 선수라면? 경기 참 편해지는 거지. 게다가 나는 옐로 카드나 레드 카드도 안 받았는데 걔는 실려나갔다고? 참으로 땡큐인 것이다. 얍삽하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승부의 세계인 것을. 2018년 있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살라를 거친 태클로 실려 나가게 한 라모스는 그날 잠만 잘 잤다카더라.


하지만, 힘으로 상대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는 역시나 힘을 써야한다는 아쉬운 점이 있다. 태클을 하려면 아무튼 나도 거기까진 뛰어가야 하니까. 이때는 말이, 그러니까 말 한 마디로 천냥 빚 갚는다, 하는 그 말이 대안이라 할 수 있겠다. 입으로 하는 공격, 나는 그걸 ‘입겐세이’라 부른다. 패드립도, 그건 좀 그렇다 싶기도 하지만, 아무튼 그중 하나라 할 수 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결승전, 지네딘 지단은 상대 수비수 가슴팍을 들이받아 레드카드를 받았다. 그게 상대의 패드립 때문이었다는 소문이…. 지단은 무력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지워진 셈이다. 단, 이 역시 힘으로 하는 반칙과 마찬가지로, 카드를 받게 될지도 모르니 조심해서 사용할 것. 욕에 엄격한 한국 아마추어 대회에서는 특히나 그렇고. 그리고 패드립은 너무하잖아.


꼭 욕이 아니더라도 약 올리기만으로 입겐세이는 가능하다. 저기, 쟤가 구멍이야! 야, 안 가도 돼! 어차피 뺏겨! 못 하는 놈이 폼은 참 많이 잡네. 너, 왜 이렇게 혼자 흥분을 했니? 문제는, 이런 말을 들으면 정말 나사가 빠져버린다는 것이다. 걸려들었다. 약 올리던 사람은 멈추지 않고 다음 콤보를 이어간다. 야, 같이 싸우지 마! 혼자 흥분하게 둬! 계속 악 쓰다 힘 빠지게 해! 야, 하하, 너 조금만 더 건들면, 하하, 아주, 카드 받고 퇴장당하겠는데? 이 지경까지 가면 정말 미쳐버리는 거지. 이런식의 입겐세이는 힘 하나 안 들이고, 상대의 멘탈을 흔들어버린다. 그래서 무모한 플레이를 하게 하고 그 결과 체력을 고갈시킨다. 일종의 마법이랄까?


2023년 9월, 서울시민리그 16강전과 8강전을 모두 하루에 치러야 했던 날이다. 16강전에서 만난, 20대 위주로 꾸려진 팀을 상대로 극적인 역전승을 하고 두세 시간 후에 만났던 8강전 상대는, 40대 이상으로 꾸려진 팀이었다. 그래서인지 우린 이번 경기가 앞 경기보다 쉬울 것이라 낙관하고 있었다. 아니, 뭐야? 배 나온 아저씨들이잖아?


우리 자만에 대한 신의 답이었을까? 자네들, 그럼 한 수 접고 해 보는 건 어떻겠나, 허허. 전반 초반 어쩌다 우린 상대에게 한 점을 내 주고 말았다. 우리 센터백이 패널티 박스 안에서 푸싱 파울을 했고, 페널티킥이 선언되었으며, 상대 키커는 침착한 슛으로 우리의 그물을 갈랐다. 세상에 그냥 이기는 경기란 없단다.


그때까지도 우린 깨닫지 못했다. 상대는 그저 배 나온 아저씨들이 아니라, 8강전까지 자력으로 올라온 팀이었다는 것을. 나 고등학교 전교 1등이었어요, 하는 ‘서울대 3대 바보’ 이야기가 떠오르는군.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듯, 우린 마음이 급해졌고 그게 플레이에 그대로 묻어났다. 무리한 공격, 실패, 상대의 역습, 전원 수비, 그것도 전력 질주로. 다시 무리한 공격, 실패, 상대의 역습, 뭐 그런 악순환. 물론, 어찌저찌해서 골문으로 슛을 한 적도 있다. 상대 골키퍼가 잘했다는 게 문제였지만. 저 대머리 아저씨가 청소년 국가대표 출신이라고?


전반전이 끝났고, 감독은 팀을 다시 집중시켰다. 차근차근 다시 하면, 아까 16강전처럼 우린 역전할 수 있습니다. 주장 친구도 한 마디 거들었다. 쟤네… 잘 해. 못 하는 사람들 아니야.


후반전이 시작되었지만 분위기는 바뀌지 않았다. 우린 여전히 화가 나 있었고 그래서 무리한 플레이로 일관했다. 왜 이러지? 밖에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경기를 지켜보던 나는 곧 그게 왜 그런 건지 알게 되었다. 악착같이 공을 뺏으려던 우리의 플레이는 거칠어졌고, 심판은 이에 반칙을 부는 일이 많아졌다. 우린 억울하다고 항의했고, 상대는 왜 카드를 주지 않냐고 항의했다. 그때 주장처럼 보이는 상대팀 아저씨가 하는 말이 들렸다. 야, 심판한테 항의하지마! 쟤네 계속 저렇게 하도록 냅둬! 그러다 지치게 냅둬! 입… 입겐세이였다.


상대는 축구만 잘 하는 게 아니라 약 올리기도 잘 했던 것이다. 실실 웃으면서 그는 우리의 자충수를 응원하고 있었다. 그것말고 그가 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지금은 모두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감독이 친구들의 멘탈을 부여잡으려고 부단히 소리치며 했던 말은 확실히 기억난다. 상대 트래쉬토크에 휘둘리지 마! 그냥 우리 거 하면 되는 거야! 물론, 우린 들을 수 없었다. 아저씨의 응원은 하나의 마법이 되어 우리를 미쳐 날뛰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미쳐 날뛰었다. 명색이 내가 동네 고순데 저렇게 까불거리는 모습 두고만 볼 수 없다! 아직도 나는 그날 진규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공을 잡은 상대 골키퍼에게 그대로 몸통 박치기 하던 그 모습. 그것말고도 두 번은 더 갖다 박은 것 같은데. 진규야, 멈춰줘. 제발….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우당탕탕. 들어간 건지 안 들어간 건지, 참으로 애매하게 공은 상대의 골대로 들어갔다. 그리고 종료 2분 전, 우린 상대의 중거리 슛에 또다시 득점을 허용했다. 거 봐, 잘한다니까. 마지막 공격, 우리의 슛을 상대 골키퍼가 놓쳤고, 어디선가 정현이 번개같이 날아와 그대로 동점골을 박아버렸다. 곧 이어진 정현의 세레머니. 그는 정말 하늘을 날고 있었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렸고, 승부차기가 시작되었으며, 우린 결국 이겼다.


모든 게 끝나고, 약 올리는 재주가 남달랐던 그 아저씨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수고했어요. 꼭 우승하세요. 화이팅. 찡긋.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는 우릴 응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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