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이면 찾아가는 호수가 있다.
바다를 가장 좋아하지만 서울에서 바다까진 머니까 대신 호수를 찾는다. 별다른 동요 없이 햇살도, 오리도, 잉어도, 수초도 심지어 동네 주민들도 온전히 받아 품는 호수. 그 주변을 한 바퀴 돌며 월요일이 얼마 남지 않아서 생기는 긴장을 푼다.
오늘은 호수 표면에 빛이 스며드는 걸 보며 세상의 티끌들을 향해 기도했다.
'앞으로 어떤 갈등 상황에 내가 원치 않게 끼는 일이 없었으면. 내가 감당할 만한 건강한 괴로움만 일어났으면.'
성경에서 제일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욥기다. 왜 갑자기 죄 없는 욥에게 재앙이 오는 건지. 그래 놓고는 신의 깊은 뜻인양 포장하는 게 어이없었다. 이미 온 불행은 다시 되돌릴 수가 없다. 나 같으면 원한이 서릴 것이다. 뮤지컬 지저스크라이스트슈퍼스타에서 가장 와 닿는 부분은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시냐는 예수의 울부짖음이었다. 부활해봤자 너무 아픈 삶을 살다간 예수다. 타인들을 위해 대속하는 게 무슨 의미인가. 자신이 가장 불행했는데.
우리가 겪는 아픔 대부분이 곱씹을수록 의미가 없다. 그저 마음 한 편이 아플 뿐이다. 더 강해졌을지언정 더 행복해지진 않았다. 신의 뜻이란 말보다 차라리 '삼재'라고 하면 납득이 될 것 같다. 삼재를 지나면 나아진다는 의미니까.
이젠 나도 호수처럼 잔잔해지고 싶다.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2화의 한 장면.
회장이 손자에게 질문을 한다.
"1등과 2등 싸움에서 3등이 이기는 걸 '어부지리'라 캤다. 맞나?
반대로 이런 속담도 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
그라믄 새우가 어부지리로 고개를 이기는 방도는 없겠나?"
이 영상을 유튜브에서 클립 영상으로 접하고는 넷플릭스로 해당 화를 찾아봤다. 손자가 뭐라 답했을지 궁금해서. 나중에 손자의 답변은 '새우의 몸집을 키운다'였다. 그게 맞을까? 새우가 몸집을 키워봤자 뚱뚱한 새우가 될 뿐.
회장의 질문은 올해 내가 줄곧 해온 질문이기도 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지?'
나는 아무래도 내가 새우 같았다. '어떻게든 고래가 화해하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해야겠다', 결심했다. 나는 평화주의자인 척 아무도 안 다치는 법을 모색했다. 그건 내가 가장 안 다치는 방안이기도 했다. 1년 후. 고래들은 여전히 화해하지 않았다. 남은 건 새우의 상처뿐. 환멸을 느낀 새우는 오랫동안 자란 바다에서 스스로 나오기로 했다.
회장이 내게 묻는다면 나는 다른 답을 낼 것이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지 않으려면, 새우가 고래가 되는 겁니다."
어차피 속담 세계에선 새우도 고래도 다 은유니까. 앞으로 새우가 고래로 탈바꿈하면 된다. 고래로 변신하면 이기기가 쉬워진다. 지금은 상처만 받고 나오는 새우 신세지만 3년쯤, 5년쯤 뒤엔 고래가 되기로 하자.
다른 방법도 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지 않으려면 새우가 힘을 합치는 겁니다."
모이면 힘이 세지는 법. 새우가 고래 크기만큼 수를 모아 힘을 합치면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 일이 없어진다. 대개 군집을 이뤄 살아가는 까마귀는 독수리가 먹이를 잡으러 자기 영역 근처에 오면 떼로 몰려와 자신보다 몇 배 덩치 큰 독수리를 쫓아내 버린다. 내가 힘이 자라는 속도가 더디면 나와 같은 새우들을 모아서 방어막을 형성하면 된다.
그런데 아무래도 고래 싸움이든 새우 싸움이든 간에 모든 싸움을 비웃는 존재가 있을 것 같다.
바다다.
바다는 자신에 비해 쬐그만한 고래끼리 힘 경쟁을 하는 게 얼마나 가소롭겠는가, 그것보다 더 작은 새우가 안 죽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건 또 얼마나 웃기고 애처롭겠는가. 기왕 은유라면 고래, 새우, 고등어, 갈치, 멸치, 문어, 산호초 등 모두 숨도 쉬고 놀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는 바다로 변하면 좋을 것 같다. 바다가 되어 싸우는 것들, 안간힘을 쓰는 존재들을 보며 '그래 봤자 너는 결국 고래일 뿐이다, 새우일 뿐이다' 하고 다 비웃어줘야지.
나는 바다. 지금은 한두 명 품는 작은 호수. 작은 호수에서 출발해 결국 너른 바다가 되어야지. 쓸데없이 내 안에서 싸움질하면 밖으로 쫓아내야지. 나는 엄한 바다. 바다는 연하기도 강하기도 한 이빨, 파도를 만들었지. 내 바다는 이빨로 플라스틱, 페수도 쫒아낼 거야. 바다는 계속 흘러가다 자신이 바다인 줄도 모르게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