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티끌 Oct 03. 2022

증오했던 곳

고개를 들어보니 그곳이다. 내가 다녔던 A 회사 근처. 그때 나는 A 회사 못지않게 이 지역을 증오했다.


8년 만이다. 외근 후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충동적으로 내렸다. '여기 맞나?' 혼잣말을 하며 지하철 출구로 나왔다. 기억력이 좋지 못한 나는 A 회사로 가는 길을 이제 알지 못했다. 어쩌면 좋지 않은 기억뿐이라 애써 잊었는지도 모르겠다. 저녁 6시 15분. 퇴근길 직장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때 8년 전 내가 느꼈던 감정이 떠올랐다.


그곳을 떠난 후 기억이 옅어지면서 한 번씩 궁금했다. 내가 왜 A 회사뿐만 아니라, 그 회사가 있던 그곳도 증오했던 것인지. 어렴풋했던 감정이 6시 15분 퇴근길 인파에 비로소 실체를 보였다. 눈앞에 군단처럼 밀려오는 직장인들 행렬을 보니 심장이 조여 오고 답답해졌다.


그곳에선 자정까지 야근이 잦았다. 어쩌다 칼퇴근으로 탈출을 해도 문제였다. 그때 회사에서 지하철역까진 엘리베이터 대기 시간을 포함하면 정시 퇴근을 해도 저녁 6시 15분쯤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그 시간엔 가장 많은 사람들이 나왔다. 주저하다 차량에 구겨 타면 사람들과 한 뼘 여유도 없이 밀착해야 했다. 인파로 인해 닫힐 듯 말듯했던 스크린도어와 지하철 문이 차례로 닫히는 순간, 포로수용소에 단체로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퇴근길은 진퇴양난이었다. 지옥 회사에서 감옥 지하철로 이동해야 하니까. 그 괴로운 마음에 내가 보는 것들은 모두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곳 주변에는 IT 회사가 많아서 후줄근한 티셔츠를 입고 출퇴근하는 남자들이 많았다. 한 번씩 눈을 감았다. 그들이 내 눈앞에서 사라지길 소원하면서.


 회사는 '잡플래닛'에 올라온 동종업계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곳이었다. 여기서 A 회사에 대해 일일이 거론하고 싶지않다.

한 가지 에피소드만. 주간업무회의 시간에 대표가 부장에게 잡플래닛에 올라간 내용 수정 지시를 했는데 왜 반영이 안 되느냐고 물었다. 나는 순간 회사 대표가 잡플래닛 대표와 아는 사이인가 싶어 놀랐다. 부장이 더듬거렸다.

"좋은 내용으로 썼는데, 잡플래닛 측이 거짓으로 판단하고 올려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회의실 내에 잠시 침묵이 돌았다. 나는 속으로 웃음을 참느라 힘들었다.


걷다 고개를 들어 보니 이유를 하나 더 알 것 같았다. 이제 보니 스카이라인이 참으로 못생긴 곳이었다. 밉게 생긴 건물들이 줄줄이 이어져 있다. 이곳 건축물들은 모두 건축법상 공개공지(열린 마당) 적용을 받지 않을 때 지어진 걸까? 퇴근길 인파처럼 건물도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공터라도 있었다면. 그때 내가 힘들어했던 이유가 뒤늦게 밝혀지고 있었다. 오히려 그땐 몰랐다. 하늘 쳐다볼 여유도 없었으니. 



행복한 표정으로 걷는 남녀 조형물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 건물 아래에서 점심 먹었던 기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근처에서 그나마 조금 마음의 여유를 찾았던 곳이다. 저 작가 작품은 지금 회사 근처에도 있다. 웃으며 걷고 있는 직장인. 지나갈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누가 출근길에 저런 표정을 짓지? 저 작가는 행복하지 않은 순간마다 작업에 몰두하는 게 아닐까? 작가들은 원래 이상향을 그리곤 하니까.'   


*


지금 회사는 강남에 있다. 이곳을 증오하진 않지만 내겐 이곳도 답답하다. 행복한 표정으로 출근하는 조형물과 달리, 이곳에 출근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거의 같다. 입은 옆으로 일자로 굳어 있고, 누군가 때릴까 겁에 질린 것처럼 잔뜩 긴장한 얼굴이다. 그들은 한 여름에도 긴 팔 양복 재킷을 입고 다닌다. 마치 <매트릭스>의 스미스 요원들이 집단으로 움직이는 것만 같다.


이곳도 퇴근길 감옥에 갇히곤 한다. 코로나19 이후 출근 시간이 분산되어서 출근길은 전보다 좋아졌다. 그것만으로도 다행스럽긴 하다. 그런데 왜 다들 퇴근은 오후 6시에 하는지 모르겠다. 8시에 출근한 사람도, 8시 30분에 출근한 사람도, 9시 30분에 출근한 사람도 왜 퇴근 시간은 다 은 걸까. 오후 6시 퇴근은 직장인 유전자에 새겨져 있는 걸까. 90년대에 삼성이 7시 출근 오후 4시 퇴근제를 했을 때도 퇴근은 대부분 오후 6시 이후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쩌면 한국인의 유전자일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여기서도 칼퇴를 해봤자 2호선 수용소행이다. 근처 카페 머물다 집에 갈 수도 있겠지만 회사 근처는 다 싫은 법. 헤매다 회사 사람 만날 수도 있으니까. 어떻게든 이곳을 벗어나려 몸을 밀어 넣고 간다. 그러다 간혹 뒷사람과 원치 않는 부분을 부딪다. 아. 고의가 전혀 아니고 상황이 문제인 걸 알지만 우리는 서로 마음이 불편해진다.  


그럴 때 난 다음 역에 내린다. 어차피 멀고 먼 퇴근길. 어디서 헤매든 상관이 없어서 불편해지면 즉시 내려버린다. 제는 7호선으로 갈아타고 어린이대공원역에 내렸다. 여기 내린 이유는 없다. 그냥 와 부딪친 사람이 싫어질까 봐 길을 꺾었. 어린이대공원역엔 세종대가 있다. 몇 년 전 세종대 앞을 지나간 후 오랜만에 왔다. 근처 리뷰가 많은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다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읽은 지 5분, 한두 쪽 읽었을까. 나도 모르게 깜빡 졸았다. 늘 불면이 문제다. 비몽사몽 주변을 보니 녁 7시가 넘어서 창밖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자주 만난 노인이 떠올랐다. 몇 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일할 때 도서관으로 출퇴근을 했다. 백수나 마찬가지였을 때라 돈을 아끼려고 택한 곳이었다. 그때 자주 봤던 노인은 책을 펴고 있긴 하지만 책 읽는 시간보다 조는 시간이 더 길었다. 매일 두 시간 넘게 격하게 졸다가 집에 가곤 했다. 그러고도 왜 꼬박꼬박 도서관에 오시는지 이유가 궁금했다. 그래도 책과 함께 있는 시간이 좋아서였을까, 지금 나처럼.  '나는 초라한 사람이지만 지금 나는 책과 함께 있다.' 이런 생각만으로 위안이 되어서 나도 졸음을 참으며 카페에 있곤 한다. 회사를 벗어나 마음의 여유를 찾아가는 내 모습이 다행스러워서. 때때로 그럴 때 나는 가난뱅이에서 갑자기 벼락부자가 된 것 같다. 


마음이 정녕 가난할 땐 카페를 찾지도 못했다. 마음이 한 발자국도 움직이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페에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책을 읽는다는 건 지난 시간과는 달라졌다는 의미다. 그래서 요즘 나는 한 시간 여유가 생겨도 카페에 가곤 한다. 마음의 사치를 부린다. 어제도 오늘도 사람을 피해 혼자 카페에 갔다. 가장 좋아하는 카페에 가기 위해 한 시간 넘게 버스를 탔다. 어젠 어느 대학교 앞에서 차가 막혀서 버스가 40분 넘게 멈춰 섰다. 그래도 괜찮았다. 지금 가는 길은 다른 길이니까. 


내가 움직이고 있다. 나는 증오했던 곳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사는 건 지루하고 죽는 건 귀찮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