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그리던 설상차를 타고 콜롬비아 대빙원을 오르고 났더니 마치 내가 탐험가라도 된 듯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밴프에 도착한 뒤로는 로키 산맥에서 캠핑, 온천, 설상차 체험 등 평소에는 해보지 못할 진귀한 경험들을 여럿 해봤다. 역시 캐나다 횡단 여행의 클라이맥스답다. 하지만 내가 경험했던 대부분의 경험들은 결국 안전하게 잘 쳐진 울타리 안에서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모험, 아니 체험이었다. 장기 여행은 가끔 예상하지 못한 변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그런 변수를 해결하면서 여행자는 성장한다.
로키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레이크 루이스에 들리기로 했다. 레이크 루이스는 세계 10대 절경의 호수 중 하나로 일본 유명 피아니스트 유키 구라모토의 동명 연주곡으로 더욱 주목받은 곳이다. 방송 삽입곡 등으로 이미 익숙한 그 선율을 들으며 우리는 레이크 루이스로 향했다. 앞서 잠시 들린 모레인 호수 역시 한 때 캐나다 $20짜리 지폐의 배경이 되었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호수를 감싸고 있는 열개의 봉우리와 그것을 덮고 있는 만년설이 에메랄드 빛 호수 위에 선명하게 비친다.
실제로 마주한 루이스 호수는 어느 인터뷰에서 한 유키 구라모토의 말처럼 우리가 상상했던 '동경'을 구체화한 듯했다. 너무 아름다워 처음에는 그 현실감을 느낄 수 없었다. 모레인, 루이스 모두 흔히 에메랄드 빛이라고 설명하시지만 밴프에서 만난 어느 호수 하나 같은 색깔이 없었다. 빙하에서 내려온 물이 각기 다른 빛의 호수를 만들어 내는 것이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이런 게 바로 자연의 신비다.
처음에 캐나다로 이민을 왔을 때 토론토에서 지냈다. 토론토는 온타리오주의 주도로 온타리오호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북미에서 4번째로 크고 전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가진 이민자들이 모여 산다. 처음에는 이 큰 도시에서 하는 모든 경험들이 새롭고 흥미로웠지만 그 모든 게 지루하게 느껴지는데 딱 3개월이 걸렸다. 토론토는 살기에 편한 도시임에는 의심이 없었지만, 가끔은 너무 정적이라 지루하게 느껴졌다. 대표적인 계획도시답게 블록처럼 가로 세로가 딱 맞아떨어지는 도로에는 오로 막도 내리막도 없었다. 나중에는 바다만큼 큰 온타리오호, 이 흐르지 않는 거대한 물웅덩이조차 너무 지루하게 느껴졌다. 잘 지어진 이 도시가 가끔은 거대한 세트장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밴프의 호수들을 만나기 전까지 나에게 호수는 그저 갇혀있는 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밴프의 호수는 토론토의 그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산과 마주 하고 있는 호수는 뭐든지 포옹해 줄 것만 같은 넓은 마음을 가진 어머니 같았다. 그런 너그러움이 느껴졌다. 잔잔한 그 호수 앞에선 뭐든 털어놓아도 될 것 같아 나는 더 많은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레이크 루이스는 마지막 밴프의 풍경으로 기억되기 참으로 적당했다. 이제는 예정된 시간이 끝나고 밴프와 작별을 고하고 밴쿠버로 넘어갈 시간이다. 밴프 국립공원 3일 입장권을 정말 알뜰하게 쓰고 로키를 떠난다. 동쪽의 가장 큰 도시에서 출발한 이번 여행이 이제 서쪽의 가장 큰 도시를 만나 마무리 되려 한다.
밴프를 벗어나기 바로 전 운 좋게 야생동물들 마주했다. 로키의 마지막 선물인가? 가이드북을 찾아보니 큰 뿔양이다. 그토록 바라던 야생곰을 실제로 보지는 못해 아쉬웠지만 우리를 배웅하듯 나와준 큰 뿔양에게 작별을 고하며 이제 정말 밴프를 뒤로했다.
아이스필드 파크웨이를 왕복하는데만 다섯 시간 정도를 썼으니 레이크 루이즈를 떠나자마자 해는 벌써 뉘엿뉘엿 기울기 시작했다. 다음 목적지인 밴쿠버까지가 약 800km 정도 남았으니 내일 조금 여유 있게 도착하려면 오늘 어느 정도는 달리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캐나다의 여름에는 해가 9시 반쯤은 돼야 완전히 지기 때문에 다른 계절보다 밝은 환경에서 조금 더 오래 운전할 수 있다. 캐나다 로드트립 시 어쩔 수 없이 야간에 운전을 해야 한다면 일정 거리를 두고 큰 트럭들을 따라가는 게 큰 도움이 된다. 대형 트럭 기사들은 캘거리부터 밴쿠버 사이의 산을 1년에도 몇 번이나 넘는 배테랑들이고, 그들의 트럭에는 밤에도 차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도록 화려한 라이트가 달려있다. 그래도 100% 안심 할 수 없는 것은 캘거리에서 넘어올 때와 달리 밴쿠버로 향하는 길은 더 긴 내리막의 커브길이 오랫동안 이어진다. 가로등도 없을뿐더러 언제 어디서 동물이 튀어나올지 모르니 항상 긴장을 놓지 말자. 잦은 브레이크 사용은 과열로 인해 성능이 떨어질 수 있으니 엔진 브레이크도 적극적으로 활용하자.
그렇게 긴장의 두 시간반 정도를 달려 무사히 레벨스톡(Revelstoke)이란 도시에 도착했다. 가이드북에도 나오지 않은 작은 동네였다. 해도 이미 져서 어두워졌고, 밴쿠버까지는 앞으로 600km 정도 남아 이 정도면 내일 운전에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아 이젠 잠자리를 정할 시간이었다. 오는 동안 적당한 캠핑장을 찾을 수 없어 저렴한 호텔을 찾길 바라며 호텔 예약 애플리케이션을 켰다. 최저 가격순으로 검색 결과를 정렬한 뒤 차마 여기선 못 자겠다 싶은 몇 곳을 제외했다. 크지 않은 동네라서 검색한 호텔에 금방 도착했으나 막상 방이 없다. 검색 결과와 실제가 달랐다. 두 번, 세 번 같은 상황이 반복되니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근처에 보이는 호텔을 되는대로 들어가 보았으나 역시 같은 상황이었다.
이렇게 작은 동네의 호텔방이 모두 꽉 찬 상태라니이. 갑자기 난감해진다. 이번 여행 최초로 노숙을 해야 하는 생각에 조금은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도시에서의 노숙은 야외에서 하는 캠핑과는 또 다른 위험을 가지고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른 호텔에 마지막으로 한번 더 들어가 보았다. 동양인 리셉셔니스트가 말하길, 예약해놓고 손님이 아직 오지 않은 방이 하나 있는데, 체크인 마감시간인 10시까지 10분만 더 기다려보고 오지 않으면 우리에게 그 방을 주겠단다. 로비 앞에 차를 임시 주차해 두고 그 방의 예약자가 오지 않기를 기다렸다. 9시 55분, 56분, 57분, 열 시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가능성은 커지고 '그래도 우린 운이 좋아..'라고 안심하려던 찰나 검은색 대형 SUV 한대가 1분을 남기고 들어왔다. 어린 딸들을 데리고 있던 그 아버지도 초조한 한 마음으로 차의 액셀을 밟았을 것이다. 간발의 차이로 오늘 밤 잘 곳이 없어지니 '멘붕'을 넘어 잠시 패닉이 왔다. 캐나다는 텐트를 아무 곳에나 칠 수가 없기 때문에 합법적으로 텐트를 칠 수 있는 안전한 장소를 찾기 위해 또 한참을 돌아다녀야 할 판이었다. 이미 밤 10시가 다 된 상황, 불과 몇 시간 전 설상차를 타고 올라 보았던 빙하와 평화로웠던 루이스 레이크의 풍경들이 오래전 일처럼 이미 까마득해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호텔 주차장 한쪽에 차를 세우고 줄리와 작전회의를 하고 있었다. 우리 상황이 안돼 보였는지 퇴근을 하던 동양인 리셉셔니스트가 가던 길을 멈추고 근처 아는 호텔 몇 곳에 전화를 걸어주었다. 가깟으로 방을 하나 찾았지만 방값이 400불이라 우리에게는 너무 사치스러웠다. 정중히 감사함을 표시하고 작별인사를 하려고 하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한국인이었다. 괜히 더 반갑고 고마워서 격하게 인사를 나눴는데, 그분은 우리를 더 도와주어야겠다는 사명감이 들었나 보다. 우선은 호텔 주차장 한편 잔디밭에 텐트를 필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셨다. 비교적 은밀한 공간에 자리를 마련해주어서 그것만으로도 너무 고마웠는데, 잠시 후 우리를 다시 찾아왔다. 확인차 호텔 사장님이랑 통화를 했는데 사장님 댁에서 우리를 하루를 재워주시겠다고 했단다. 이렇게 감사할 때가. 알고 보니 사장님도 한국분이셨다. 멀리 타국 이름도 처음 듣는 동네에서 느끼는 한국인의 인심이라 정말 뭉클했다. 우리는 간단한 세면도구와 침낭을 챙겨서 사장님 차에 동승했다. 늦은 시간이라 죄송했지만 그럴 생각을 할 새도 없이 일이 벌어졌다. 잘 곳을 구하지 못해 짧은 시간 여러 곳을 헤매며 당황했는데,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순식간에 정해진 숙소가 우리에겐 황송할 다름이었다.
지붕 있는 곳에서 잠을 재워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맥주와 함께 이런저런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사장님은 한국에서 대기업을 퇴사하고 밴쿠버로 이민을 왔고, 현재는 밴쿠버와 레벨스톡을 오가며 호텔 사업을 하고 계셨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민 와서 서로 살아온 이야기, 우리 여행 이야기 등을 나누었다. 고생을 해본 사람 입장에서는 고생을 하고 있는 젊은이들의 깊이 공감하고 격려해주셨다. 친히 아껴두었던 사업 아이템까지 공유해주시며 젊은 이민자들이 캐나다에서 성공하길 바란다는 좋은 말씀과 에너지를 아낌없이 주셨다. 침낭에 들어가 잠을 청하며 세상은 넓고, 참 많은 종류의 사람이 있고, 그중엔 참 좋은 사람이 많구나 새삼 생각했다. 다만 쉽게 눈에 띄지 않을 뿐. 여행을 하다 보면 자석에 이끌리듯 좋은 사람들을 우연히 만나는 경우가 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런 귀인을 만나는 것이 바로 여행의 묘미가 아닌가 싶다.
다음 날 아침 사장님의 배려로 호텔 조식까지 먹고 출발할 수 있었다. 상쾌하고 기쁜 마음으로 길을 나서는데 레벨스톡(Revelstoke)의 산세가 눈에 들어왔다. 레벨스톡은 작은 마을이지만 밴쿠버와 캘거리 사이를 로드 트립할 때 쉬었다 가기 좋은 위치에 있고 근처에 스키장이나 액티비티 할 곳이 많아 장기렌트를 하며 머무는 여행객이 많다고 한다. 어젯밤 괜히 숙소를 구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레벨스톡을 빠져나가기 전 마지막 다리 옆 공터에 우리랑 똑같은 텐트를 치고 노숙하는 여행자를 우연히 보았다. 인심 좋은 사장님과 직원분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우리 역시 저 옆에 나란히 같은 텐트를 치고 밤을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여행 중 한 두 번쯤은 노숙을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으나 마음 좋은 한국분들을 덕분에 지붕 아래서 잘 수 있었고, 넓은 캐나다에서 한국인의 인심을 체험할 수도 있었다. 처음 이름 들어본 작은 이 동네에 좋은 추억이 하나 생겼다.
그날의 신세를 다시 갚을 날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감사한 마음을 아직도 가슴 한구석에 뜨겁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또 한 번 인연이 닿기를 바라며 오늘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