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는 왜 매년 살기 좋은 도시로 뽑힐까?
살기 좋은 나라 순위에 매번 이름을 올리는 캐나다, 그중에서도 특히 살기 좋다는 밴쿠버라는 도시. 어떻게 그렇게 좋은 평가를 매년 받는 걸까? 살기 좋은 도시를 판단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예술가가 살기 좋은 도시가 곧 살기 좋은 도시라고 생각한다.
노래를 하는 사람, 그림을 그리는 사람, 글을 쓰는 사람, 우리에게 기쁨과 영감을 주는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그런 도시 말이다. 예술가들은 어떤 환경에서 자신들의 예술 활동을 지속할 수 있을까? 대중들은 어떨 때 시간과 돈을 들여가며 예술을 소비할 수 있을까? 두 가지 질문만 던져봐도 예술가들의 활동 지수와 사람들이 느끼는 삶의 만족도 사이의 상관관계가 어느 정도 예상된다.
욕구 단계론으로 유명한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 에이브러햄은 사람의 욕구를 생리적 욕구, 안전에 대한 욕구, 소속감 등의 3단계 하위 욕구와 4단계 존중받고 싶은 욕구, 5단계 자아실현 욕구 등의 상위 욕구, 총 5단계로 나누었다. 그는 인간이 행복을 이 다양한 단계의 욕구가 얼마나 충족되느냐에 달려 있는데, 이때 상위 욕구보다 하위 욕구가 우선적으로 충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보통 집과 가구를 구매한 다음 마지막으로 액자나 화분 같은 장식을 구매하는 것과 같다.
캐나다의 밴쿠버는 물론이고 호주의 살기 좋다는 도시들 역시 여행하며 많은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어떤 매력이 예술가들을 이 도시들로 끓어 들이는 걸까?
밴프에 머문 2박 3일을 제외하고는 하루에 꾸준히 600km 이상을 달려 몬트리올을 떠난 지 정확히 10일 만에 밴쿠버에 도착했다. 비행기를 탔으면 4시간이면 왔을 거리를 우리는 차를 타고 온 덕에 4,500km를 몸소 실감할 수 있었다. 어제는 도착 후 캠핑장에서 빨래도 하고 수영도 하며 여행 후 처음으로 개인정비 시간을 가지며 여독을 풀 수 있었다.
오늘은 밴쿠버 시티투어를 하는 날이다. 토론토와 밴쿠버는 가장 익숙한 이름을 가진 캐나다의 두 도시지만 그 익숙함과 비례하는 만큼의 정보는 없었다. 매년 세계에서 살기 좋은 도시에 뽑히는 동네, 이민자의 천국, 겨울에도 날씨가 온화한 편이라는 것, 밴쿠버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이 정도가 전부였다. 그래서 오늘은 선입견 없이 밴쿠버를 한번 느껴보려 한다.
밴쿠버 투어를 시작한 곳은 그랜빌 아일랜드(Granville Island)였다. 밴쿠버 다운타운으로부터 남쪽으로 다리 하나 건너 위치한 작은 반도다. 원래는 그 이름처럼 섬이었으나 지금은 땅을 메꾸어 반도의 형태가 되었다고 한다. 과거에 공장지대였던 섬을 정비해 지금은 시장과 갤러리 등이 공존하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인사동에 있는 쌈지길이 대표적으로 이런 복합 문화공간을 표방하고 있다. 복합 문화 공간은 지역의 상인과 예술가, 주민들이 상생하는 공간이다. 지역마다 한 때는 최신식의 기계가 돌아가며 물건이 생산되거나 판매되는 곳이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노후되고 낙후되는 공간이 생기기 마련이다. 보통 이런 곳을 정부에서 구입함으로써 복합 문화단지는 시작된다. 리모델링으로 재탄생된 공간은 보통 저렴한 임대료에 젊은 예술가나 청년 창업가, 소상공인들에게 되어 도시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한다.
뉴욕의 소호나 미트패킹 거리는 정부의 계획적인 투자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만 낙후된 지역의 저렴한 임대료 덕에 가난한 예술가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들었고, 뉴욕 예술을 상징하는 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이러니하게도 소호거리를 유명하게 만들었던 예술가들은 비싸진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떠나버리고 명품 매장이 들어선 쇼핑거리가 되었다. 그러니까 예술가 없는 예술거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정부 주도로 생긴 복합 문화 공간은 임대료 상승으로부터 지역 예술가와 소상공인들을 보호하여 이런 부작용을 막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기업이 자본을 지원했다는 점에서 그 시작은 조금 다르지만 인사동 쌈지길은 지금은 나름의 역사와 영향력을 가진 우리나라 대표 복합 문화 공간이 되었다. 청주에도 옛 제조창을 이용한 문화단지가 있고, 전주에도 시장 안에 위치한 청년몰이라는 곳이 있다. 10여 년 전부터 우리나라 곳곳에 크고 작은 복합 문화 공간이 생기고 없어지고를 반복하고 있다. 아직은 시작 단계에 있어 지역주민들과의 연계 부족, 홍보 부족 등의 문제로 결국 그들만의 잔치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곳 그랜빌 아일랜드는 한국의 복합 문화 공간에 아주 좋은 롤모델이 될 것 같다. 나 역시도 실제로 많은 영감을 받았다. 어떤 부분이 그렇게 좋았는지 그랜빌 아일랜드를 함께 둘러보자.
도시는 항상 주차공간이 부족하다. 우리는 그랜빌 아일랜드의 퍼블릭 마켓을 구경하고 다운타운까지 넘어갔다 올 계획으로 이곳의 공영 주차장에 주차를 했다. 도착한 시간이 오전이라 아직 한산했다. 그랜빌 아일랜드는 크게 세 가지 지역으로 나눌 수가 있다. 복합 문화단지 예술 부분의 주축을 이루는 갤러리, 예술학교 및 작가들의 작업실이 섬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그 좌측에는 퍼블릭 마켓이라는 이름의 재래시장으로 아티스트들의 소품은 물론 밴쿠버 지역에서 생산되거나 채집된 식재료를 판매하고 있다. 그 신선한 재료들을 이용한 특색 있는 레스토랑과 소규모 양조장이 섬의 곳곳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마지막 강 주변으로는 수상 주택이 있어 섬 하나로 작지만 완벽한 마을의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 지역 주민, 상인, 예술가가 골고루 조화되어 있는 느낌이다.
기존에 있던 폐공장의 구조물을 거의 그대로 사용 중이라 얼핏 보면 상막할 것 같지만 예술가들의 열정과 그들 작품의 온기로 섬 전체가 가득하다. 그랜빌 아일랜드의 핵심은 바로 예술이다. 곳곳에 예술학교의 건물과 작가들의 작업실로 보이는 곳들이 있는데, 밖에서도 안을 볼 수 있도록 꽤 오픈되어 있어 작가들의 작업 과정이나 수업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다. 그 밖에도 삼삼오오 모여서 데생을 하는 그룹을 길거리에서 자주 만나게 된다. 집들의 우체통이나 벽화, 다양한 길거리 공연 등 예술적으로 영감을 받을 수 있는 요소들이 섬 곳곳에 숨어 있다. 몇 결음 가지 못해 계속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게 되는 이유다.
시장 안으로 발길을 돌려보았다. 나는 세계 어느 도시를 처음 여행하던 스타벅스보다는 재래시장 찾기를 참 좋아한다. 스타벅스가 언제 어디서나 일정한 품질의 커피를 제공해 준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가끔은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러 여기까지 왔나 하는 회의가 들기 때문이다. 여행을 갔으면 그 지역에서만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제일 좋다. 재래시장은 그 지역의 특성을 제일 잘 보여주는 곳이다. 그 지역의 대표 음식과 술을 마시는 일은 낯섦을 익숙함으로 바꾸는 여행의 참 묘미이다. 재래시장에서는 그곳의 에너지 또한 느낄 수 있다. 사람이 무언가에 열중할 때 뿜어내는 활기가 좋다.
퍼블릭 마켓의 상인들은 생각보다 젊었다. 재래시장 특유의 투박함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런 이유일 것이다. 자신이 판매하는 상품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나오는 애정과 자부심을 그들로부터 느낄 수 있었다. 멋이라는 건 꼭 외적인 우월감에서만 나오는 건 아니다. 누군가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몰두할 때 우리는 그 사람 뒤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를 보고는 한다.
이 총각이 팔고 있는 도넛은 냄새가 너무 좋아서 나도 모르게 멀리서부터 이끌려갔다. 갓 구운 크로켓을 하나 사 먹었는데 그 맛이 정말 예술의 경지였다. 퍼블릭 마켓에는 이렇게 먹을 수 있는 예술품이 많이 있었다. 눈과 입이 즐거운 채로 계속 걷다 보니 나중에는 꽃을 배달하는 트럭, 길에 놓인 휴지통까지 하나의 예술 조형물처럼 아름답게 보였다.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여우만 사람을 홀리는 것은 아닌가 보다.
단지 그럴듯한 디자인의 샵이 많아서 이 섬이 그렇게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만은 아닐 거다. 예술가, 소상공인, 지역주민들이 적당하게 어우러져서 그 어떤 특정인들을 위한 게 아닌 모두를 위한 작은 마을을 만들었다는 것에 아마도 너무 감동을 받았던 거 같다. 예술은 이렇게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하는 것이다. 강 건너 마주하고 있는 밴쿠버 도심의 높은 빌딩들에 사이에서만 뛰어놀며 자란 아이들과 이 섬의 수상 가옥들 사이에서 뛰어놀며 자란 아이들은 미래에 분명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술가 또는 지망생들에게 예술을 배우고, 만들고, 판매까지 이루어질 수 있는 공간이 한 곳에 다 모여있다는 점은 꽤나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나도 예술을 전공했던 사람으로서 그랜빌 아일랜드의 시스템과 그곳에서 예술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부러웠다. 이 섬 하나만으로도 이미 밴쿠버에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린빌 아일랜드는 Canada Mortgage and Housing Corporation(CMHC, 캐나다 모기지 주택공사)라는 정부기관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 섬의 예술 공간들은 시민들의 세금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누구나 와서 구경할 수 있고 그렇게 공공예술을 통해 시민들에게 고스란히 되돌아간다. 섬에 와서 예술품을 감상하고 산책을 하며 영감을 받은 시민들은 작가들의 아트상품을 구매하고 배가 고프면 지역에서 생산된 식재료를 구매하여 집으로 돌아가던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것이다. 자연스럽게 예술가들과 시민, 상인들이 상생하는 구조인 것이다. 살기 좋은 도시라면 이렇게 모든 시민에게 개인의 부와 상관없이 삶에 여러 가지 만족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