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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천 km 운전해 갔는데 울루루에 오를 수 없었다.

세상의 중심 울루루에서 배운 '존중'에 관하여

울루루는 호주의 정중앙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바위로 높이 348m, 둘레 9.4km로 그 크기가 산만하다. 일본 영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의 배경으로 우리에게 유명해진 이곳은 원주민 말로 '그늘이 지는 장소'라는 뜻으로 영혼들의 성지로 여겨졌다. 원주민들에게 이곳은 세상의 중심이었으며 지구의 배꼽으로 불렸다. 이번 캠핑카 여행의 가장 큰 목표는 역시 이 울루루를 보는 것으로 지금까지 약 4천여 킬로미터를 달려왔다. 지난 캐나다 횡단 여행 때 명색이 자동차 여행인데 그 흔한 펑크 한번 나지 않아 나중에 책에 쓸 자동차 관련 에피소드가 없다고 우스갯소리를 했었는데, 이번에는 고맙게도(?) 기름이 떨어져 차가 서는 일이 발생했다. 고마운 인연으로 사막 한가운데에서 휘발유 20L를 얻은 우리는 다시 울루루를 향해 달릴 수 있었다.


드디어 울루루가 저 멀리 내 눈 앞에 보이기 시작한다.


저 멀리 울루루가 보이기 시작할 때 심호흡을 크게 한번 했다. 그리고 조금씩 가까워지는 그 시간을 즐기기로 했다. 산 정상에 케이블카를 타고 오를 때와 걸어서 등반했을 때의 그 감동은 전혀 다르다. 로드트립의 묘미는 저 멀리 목적지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보이며 조금씩 가까워지는 순간이다. 그래서 이 순간을 나는 오롯이 즐기고 싶었다. 5억 년 동안 풍파를 견디며 이곳에 줄곧 서 있었을 이 거대한 돌덩이와 조우하기 위해 지난 며칠을 꼬박 달려왔다. 내 인생 약 30년 중의 그 며칠은 가치 있는 시간이었을까? 


마침내 눈앞에 펼쳐진 울루루. 말 못 하는 돌멩이지만 울루루의 이곳저곳에서는 시간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눈에 보이는 크기보다 땅 속에 묻혀 있는 부분은 더 크다고 하니 정말 놀랍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나도 얼른 울루루 중심에 우뚝 올라 세상 모습을 내려다보고 싶었다. 



주차장에 캠핑카를 세우고 울루루에 가까이 다가섰을 때 한 무리의 여행객이 안내판을 주목하고 있었다. 입산 안내문인가 싶어 우리도 가까이 가 보았다. 그런데 그 글을 읽고 우리는 결국 울루루에 오르지 않았다. 그 안내판은 입산 안내문인 동시에 회유문이었다. 맨 왼쪽은 울루루의 전통적 주인인 아난구(Anangu)족 원주민들의 글로 울루루는 성스러운 곳이니 오르지 말고 그 주변을 돌며 이 장소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발견 하기를 호소하고 있었다. 맨 오른쪽의 표지판은 이 울루루를 그들로부터 임대하여 관리하고 있는 호주 국립공원 측의 입장문으로 '깊은 이해'에 대한 부가 설명이 있었는데 제목은 '존중에 관한 질문(A question of respect)'이었다. 요약하면 '정상을 정복하면 자부심, 성취감, 소유 등의 강력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그것은 오래된 사고방식이 아닌가?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을 계속하는 게 과연 (미래에도) 옳을까?라는 내용으로 스스로에게 질문해보기를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특히 마지막 문단(Is this a place to conquer - or a place to connect with?)은 직역하면 '울루루는 정복해야 할 장소일까? 아니면 연결할 장소인가?'정도로 번역되지만 깊이 생각해보면 '원주민은 정복의 대상인가? 아니면 친구인가'정도로 해석할 수 있어 과거의 유럽인들이 원주민을 대했던 방식이 옳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하는 문구였다.  



울루루의 정상으로 향하는 쇠말뚝은 여전히 여전히 그곳에 굳게 박혀 있었다. 하지만 그날 나는 울루루에 오르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우리 역시 울루루에 오르기 위해 수천 킬로미터를 달려왔지만 결국 오르지 않았다. 


할머니가 예전에 "문 앞에 앉아 밥 먹으면 복 날아가!", "다리 떨면 복 날아가"하는 이야기를 내게 하면 난 "그런 거 다 미신이야"라며 오히려 더 반항하기도 했다. 울루루가 신성한 곳이라는 원주민의 생각 역시 미신 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안내문을 읽고 나니 설령 그게 미신이었을지언정 오랫동안 그렇게 알고 살아온 할머니 말을 한번 더 들어줄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 어제 날짜로 한국을 떠나온 지 딱 만 3년 되는 날이었다. 애들레이드에서 울루루까지 1,500km를 운전해 오는 동안 지난 3년간 외국 생활하며 얻은 것 들을 줄리와 함께 정리해 봤다. 나는 Jang, 지혜는 Jully라는 영어 이름을 얻으며, 우리의 가장 큰 목표였던 캐나다 영주권을 취득했다. 그 나는 과정에서 불어(TEPAQ)와 영어(IELTS) 공인시험 점수, 캐나다 직업교육 학교 졸업장도 생겼다. 나는 호텔리어로 줄리는 네일 아티스트로 2년간 해외 직장 생활도 경험했다. 특히 줄리는 필리핀 영어연수 3개월만으로 이뤄낸 성과다. 외국에서 첫 차를 사고, 여행도 정말 많이 다녔다. 정리해보니 캐나다 8개 주, 미국 11개 주, 호주 5개 주 해서 총 31개 도시를 여행했다. 특히 그중에서도 지난 캐나다 자동차 횡단 여행과 이번 호주 캠핑카 일주는 정말 돈 주고도 사지 못할 많은 추억을 남겨주었다. 외국 생활하며 만났던 사람들 이름도 한 명, 두 명 적다 보니 22개국에서 온 150명의 친구들을 만났다. 정들었던 사람들과 헤어질 때 다신 못 만나겠구나 하며 펑펑 울었는데 그래도 그중 몇몇은 여행하면서 운 좋게 다시 만날 수 있었다좋은 인연이 그렇게 계속 이어지는 걸 보면 참 신기하다. 그렇게 3년 동안의 지난 일들과 이름들로 A4 용지 2장을 가득 메웠다.


A4 용지 두장 가득 적은 3년간 우리의 기록들

울루루 앞의 안내문처럼 우리가 오늘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내일도 계속 유효할지 아무도 모른다. 항상 열린 마음을 갖고 배우는 자세로 세상 사물과 사람을 대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친구가 되어야지 정복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살던 지난 3년간 몸으로 배운 것 역시 어디 사느냐보다 중요한 건 누구와 함께 하느냐였다. 새삼 3년 동안 옆에서 함께 울고 웃어준 메이트 줄리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어 진다. 울루루에서 나는 그렇게 많은 생각이 들었다.



울루루-카타추타 국립공원 이사회 결정에 따라 2019년 10월 26일부터는 울루루 등반이 전면 금지됐다. 나는 이날 울루루의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를 영원히 잃어버렸다. 하지만 전혀 후회되지 않는다. 공원에서 아무런 설명 없이 '울루루 입산 금지'라는 표지판과 함께 바리케이드를 치고 강제했다면 진작 이곳에 오르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을 듯하다. 하지만 원주민의 호소문과 그들의 생각을 존중하는 공원의 입장문에 나의 마음이 움직여 스스로 한 결정이기 때문에 오히려 울루루에 오르지 않은 것이 자랑스럽게 생각되었다. 대신에 우리는 울루루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공원 사무실 안에 있는 '나는 울루루에 오르지 않았다' 캠페인 등록 노트에 서명을 했다.


존중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본 오늘, 우리는 세상의 중심 울루루에서 잠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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