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과 엘리스 스프링스의 원주민들을 보고 느낀 점
브리즈번, 시드니, 멜버른까지 호주의 대도시들을 연달아 여행하면서 그곳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이 멋지다고 항상 생각했다. 하지만 호주 여행 막바지에 들린 두 도시, 엘리스 스프링스와 다윈에서 호주 원주민들의 생활 모습을 실제로 보고 조금 충격을 받았다.
많은 원주민들이 신발도 신지 않은 채로 도시 곳곳에서 노숙 생활을 하고 있었다. 호주의 다른 도시에서도 노숙자들을 많이 봤기 때문에 노숙 생활하는 누군가를 보는 일 자체가 놀라운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영어를 할 수 없는지 알아듣지 못할 말들로 중얼거리는데 언어라기보다는 포호처럼 들리기도 했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가족 단위로 노숙 생활을 하고 있는 원주민들도 보았고, 구걸을 할 여력조차 없어 보이는 원주민들도 있었다. 시드니나 멜버른의 노숙자들이 동전을 구걸하는 통을 옆에 세워두고 유유자적 책을 읽던 모습과는 확실히 달랐다. 다른 도시 노숙자들의 길거리 생활은 자발적 선택으로 느껴졌지만 엘리스 스프링스와 다윈에서는 아니었다. 호주 정부에서는 원주민들을 위한 지원정책을 꾸준히 펼치고 있다고 선전했지만 실제로 그들의 생활 모습을 보면 아직도 그 노력이 충분해 보이지는 않았다.
다윈에 거주하고 있는 몬(Mon)조차 원주민들은 무섭다며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카메라도 들고 다니지 말라고 했다. 평범한 거리에서 권총 강도를 당하는 일도 종종 있는 필리핀에서 자란 그가 원주민들에게 위협을 느끼는 이유는 아마도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거리의 아이들은 사람과 제대로 된 소통을 할 수 없다. 한 도시에 마치 두 세계가 공존하는 것 같았다. 서로가 서로를 보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모든 게 너무나도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고 생각했던 호주의 이면에 이런 모습이 있다는 게 내겐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나의 세대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유럽인 시각의 세계사를 배우며 자랐다. 하지만 사실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 대륙은 원래 그곳에 있었으며 원주민들은 그곳의 주인이었다. 호주의 원주민들은 5만여 년 전에 먼저 도착하여 고유문화를 갖고 살고 있었지만 1967년이 되어서야 호주인으로 인정받고 시민권을 받았다. 그 뒤로 17년이 더 지난 뒤에야 투표권도 가질 수 있었다. 최근에는 호주의 날 행사가 열리는 행사장 옆 편에 원주민의 날 행사가 함께 열리는 풍경도 볼 수 있다. 나 역시 나라를 빼앗겨본 역사가 있는 민족이기 때문에 삶의 터전을 빼앗긴 원주민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이해할 수 있었다. 빛이 있는 세상 어느 곳이든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절대 잊으면 안 된다. 잊지 않는 게 모든 일의 시작이다.
우리는 9개월 간의 호주 생활은 이렇게 다윈에서 마무리되었다. 4년 전 호주의 골드 코스트와 시드니를 여행 한 뒤 외국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어 호주 워홀을 준비했다가 비자 문제로 엎어지고 캐나다행 비행기를 탔다. 캐나다 생활은 매우 만족스러웠지만 그래도 처음 외국 생활에 대한 좋은 인상을 준 호주에 미련이 계속 남아 다시 호주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사람은 쉽게 망각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한 곳에 오랫동안 머물면 초심을 잃고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기 쉽다. 만약 내가 한국에 계속 살았다면 대한민국이 그렇게 대단한 나라라는 것을 몰랐을 테고, 캐나다에 계속 머물렀다면 사람에게 사계절이 그렇게 중요한지도 몰랐을 거다. 세상에 파라다이스는 없다. 유토피아는 사람의 이상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세상 무엇이든 장단점이 있고 특히 사람은 서로의 단점을 보듬으며 살도록 만들어졌다. 단점을 서로 들춰내고 공격하면 결국 함께 죽을 것이고 서로 도우면 영원할 것이다. 언뜻 들으면 사이비 종교의 교리 같지만 이게 내가 지난 시간 외국 생활을 하면서 배운 '인간성의 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