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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작가’에서 그냥 ‘작가’ 되기

인생은 생각보다 길고, 젊음은 생각보다 짧다.

작년 여름, 내가 5년 동안 착실히 다니던 직장에서 퇴사를 고민할 때, 제일 걸리는 것 중 하나는 바로 ‘2세 계획’이었다. 그동안은 이민과 이직의 과정 중간에 있어 ‘안정’이란 말과는 다소 거리가 먼 생활이었지만, 이제는 아이를 가져도 될 정도로 삶이 안정되던 차였다. 다니던 직장은 캐나다 이민생활 4년 만에 찾은 안정된 직장으로, 외국에 살지만 한국 문화를 현지인들에게 알리며 조국에 봉사할 수 있는 좋은 직업이라 생각하며 사명감을 가지고 매일 업무에 임했다. 보람을 느끼며 일하던 것도 잠시 연차가 늘어날수록 회사 생활에 회의가 들고 결국 번아웃이 왔다. 


어릴 적 의례적으로 적어내는 외교관, 선생님 같은 장래희망 외에 처음 나 스스로 갖었던 꿈은 ‘만화가’였다. 방학식이 끝나고 학교 앞 문방구에서 구입한 3천 원짜리 연습장의 흰 종이 위를 내가 만들어 낸 캐릭터들로 빽빽하게 채웠던 중학교 첫여름 방학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내가 처음으로 좋아하고 집중했던 일이지만 언젠가부터 더는 만화를 그릴 수 없게 되었다. 아무도 나에게 만화를 그리지 말라고 ‘말’ 한 사람은 없었지만 부모님이 이혼과 연이은 아버지의 사업 부도에 장남으로써 어깨가 무거웠다. 내 이름의 한자 뜻처럼 ‘법의 얼굴’은 못되더라도(한자로 얼굴 용(容) 자에 법 준(準) 자를 쓴다.) 그에 준하는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아쉽게도 당시 내가 생각하기에 만화가는 그런 직업이 아니었다.


다행히 대학 진로를 정할 때쯤 재기에 성공한 아버지 덕에 나는 미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작가가 되고 싶은 진심을 마음속에 숨기고, 그림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나 디자이너 등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계속할 수 있는 직장인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한 달 생활비 중 4분의 3을 재료비에 쓰고 매일 라면만 먹어도 행복했다. 나의 아이디어가 작품으로 완성되는 창작 활동의 모든 과정이 즐거웠다. 군대에 다녀온 뒤로는 매년 장학금도 탔고, 학과 조교로 근무하며 대학원까지 진학했다. 아무리 학교생활을 열심히 해도 졸업 후 진짜 작가가 되는 일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작품을 제작하고 전시를 해 꾸준한 수익을 내기까지 버텨야 하는 시간이 험난하고 막막했다. 많은 작가 지망생들이 대학에 출강 하기를 꿈꾸지만 현실은 미술학원 강사가 되는 일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문은 좁고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많아 그림 실력 외에도 필요한 것들이 많았다.  


나는 '세상 모든 경험이 나중에 나올 나의 작품들을 더 풍성하게 해 줄 거야’라고 생각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동대문과 청주를 오가며 여성복을 떼어다 사진을 찍었고, 온라인 시장에 판매했다. 사진 촬영, 홈페이지 제작, 홍보와 마케팅까지 직접 하면서 ‘작가’까지는 아니지만 이것 또한 창작을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500만 원을 들여 시작한 사업의 연 매출이 4천800만 원을 넘으며 간이과세자에서 일반과세자가 되었을 때, 주변 건물 몇 채를 가지고 있던 당시 우리 매장의 건물주는 오히려 간이과세자라 나에게 세금계산서를 발행해 줄 수가 없었다. ‘나 같은 돈 없는 젊은이가 한국에서 돈을 버는 게 쉬운 일이 아니구나’ 실감하며 진짜 세상 경험을 했다. 일을 하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 나가는 것도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호주 여행을 다녀온 뒤에 자극을 받아 더 넓은 세상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업을 정리한 돈으로 필리핀 어학연수를 하고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직업학교를 다니며 호텔 서비스를 배우고 외국계 호텔에 취업하여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영주권 취득 후에는 현지 우리나라 영사관에 취직하여 한국의 미술, 문화, 음식 등을 현지인들에게 알리는 행사도 여럿 기획했다. 


작가가 되지는 못했지만 주어진 기회에 항상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다. 직장생활 중에도 ‘직장인 작가’라는 필명으로 창작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어느덧 정신 차려보니 ‘작가’라는 단어는 어느새 내 인생에서 빠지고 누구보다 착실한 ‘직장인’이 되어 있었다. 퇴사를 고민하며 생각해보니 나는 여태까지 매번 스스로 꿈을 포기해놓고 주변 환경 때문이라고 합리화해왔다. 사실은 주변의 압박보다 나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용기가 없었고 간절함 역시 부족했다. 나는 무엇보다 ‘꿈을 이룬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중에 태어날 자식에게 “나는 너 때문에 내 꿈을 포기했어”라며 한탄하는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아내도 그런 나를 이해해주었다.


그렇게 나는 5년 동안 다니던 직장에 사직서를 냈다. 다시 붓을 들진 못했지만 ‘직장인 작가’라는 필명으로 글을 쓰고 촬영한 사진과 영상을 인터넷에 올렸다. 나의 지난 경험이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리라고 믿었다. 나처럼 혼자 진로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살포시 내미는 손’ 같은 글을 쓰고 싶었다. 지난 4월 드디어 첫 책을 출판했다. 혼자 쓰고, 감수하고, 표지 디자인에 홍보까지 직접 해야 하는 독립출판은 생각보다 할 일도 많고 어려웠지만, 내가 했던 경험들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어 행복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콘텐츠를 만드는 법’은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도 아니고 독자가 듣고 싶은 말만 해주는 것도 아니다. 시대에 필요한 가치를 담아야 한다. 사람과 짐승이 다른 한 가지를 생각해보니, 생각을 문자로 정리하여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글을 통해 학습하고 이성을 바탕으로 본능을 절제하며 서로 조화롭게 사는 것이 우리 인간성의 본질이다. 


최근 어르신들에게 스마트폰 사용법을 가르치는 강의를 제의받아 시작했는데, 남을 가르치면서 오히려 내가 배운 것이 있다. 누구나 타인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미 성공한 경험담은 다음 세대에 더 빠른 지름길을 알려줄 테고, 실패한 경험담은 되풀이하지 않아도 될 교훈을 줄 것이다. 어르신들에게 SNS 사용법을 알려드리며 좋은 경험과 생각들을 많이 공유해주실 것을 당부드렸다. 그리고 나 역시 나의 경험담이 누군가에게 도움 되는 담백한 사례집이 되기를 바라며 매일 아침 키보드를 두드린다. 


인생은 생각보다 길고 젊음은 생각보다 짧다. 누구도 나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도 책임져줄 수도 없다. 과거의 나처럼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젊은 친구들에게 결정하고 행동할 용기를 주는 글을 쓰고 싶다. 소소하지만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글들을 하루하루 써가며 나는 그렇게 진짜 작가가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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