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긴 혼잣말

성숙과 정상에 관하여

by party noodle


성숙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성숙한 사람을 정의할 때 많은 사람이 “감정에 휘둘리지 않거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과 같은 특성을 말하는 것을 본다. 예전에는 나 역시 그렇게 대답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나는 심각하게 일희일비하는 사람이고, 그로 인해 여러모로 데미지를 입은 적이 많았고, 그런 나를 미성숙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공부하며 알게 된 바에 의하면 그런 특성은 오히려 성숙과는 거리가 멀다. 상담 심리학에서는 성숙을 통합의 정도로 바라본다. 말하자면 어떤 경험에 대해서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충분히 경험하고, 나에게 일어난 일로 인정하는 것이 더 성숙하다는 의미다.

과거의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성숙한 사람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거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억압하거나 외면하는 것에 더 가깝다. 굳이 분류를 하자면, 성숙하기보다는 미성숙한 것이다.


우리가 단체로 허무맹랑한 오해를 하는 건 아니다. 상대적으로 감정 표현을 많이 하는 것으로 보이는 서구 문화에서도 감정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아주 자유롭고 편하게 여기는 것 같진 않다. 심지어 심리학에서도 감정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연구를 하게 된 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고 배웠다.

그렇다면 빨리빨리와 효율 추구의 민족인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어떨까. 빠르고 효율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일이 산더미인 와중에 감정을 신경쓰고 표현한다는 건 일처리를 방해하는 아주 귀찮은 일이나 마찬가지일 거다. 게다가 우리는 좋은 게 좋다고, 갈등은 되도록이면 피하라고 배워오지 않았던가. 긍정적인 감정 표현은 오글거린다고 쿠사리를 먹는 마당에, 긍정적이지도 아닌 감정을 표현했다가는 감정의 적절성 여부와 관계 없이 괜히 분위기나 깨는 사회성이 결여된 사람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그러니 에잇, 따로 시간을 내어 공부를 하지 않는 이상 심리학 이론에서 말하는 성숙 따위 알 게 뭔가. 우리가 눈치로, 공기로 경험하고 학습한 방식으로는 감정 따위 가볍게 외면할 줄 아는 것이 더 성숙한 거다. 그것이 사회에는 더 기능적이고 적응적인, 바람직한 모습으로 비춰질테니까.



며칠 전, 수업을 들으면서 오토 컨버그라는 정신 분석 계열의 심리학자는 성격 조직을 정상, 신경증, 경계선, 정신병의 구조적 범주로 나누었다고 배웠다. 그가 기술한 ‘정상’ 범주의 내용에는 심리학적으로 ‘성숙한’ 특성이 줄줄 나열되어 있었다. 의구심이 들었다. 이게 정상이라고?

그럴 리가 없다. 정상이라면 무릇 대중의 평균 특성을 대변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나의 정의대로라면 컨버그는 범주의 이름을 바꿔야 한다. 경계선과 정신병은 그대로 두고, 정상은 성숙으로 신경증은 정상으로. 내가 보기엔 지구상엔 신경증적인 특성을 지닌 사람들이 훨씬 더 많고, 그래서 그게 더 정상처럼 여겨진다.

아니 그런데 바로 위의 문단을 쓰고 나서 내가 정상에 대해 지니고 있는 개념이 너무 폭력적인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이쿠 무서워라. 되도록이면 나는 비폭력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


네이버에 들어가 정상을 검색했다. 네이버 국어 사전에 의하면 정상의 의미는 무려 열 일곱가지나 된다. 그 중에서 내가 생각한 정상에 가까운 단어는 정상2로, 특별한 변동이나 탈이 없이 제대로인 상태를 의미했다.

내가 찾으려던 단어와는 미묘하게 다른 것 같은데? 다른 번호의 정상을 찾으려 했다가, 반의어에 변태, 불구, 비정상이 적힌 것을 보고 굳이 다른 번호에서 그 의미를 찾을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정상은 평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구나. 정상에 대한 새로운 조작적 정의가 필요하다는 뜬금 없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정상2의 위에는 정상 10이 있었는데, 이것의 의미는 1. 산 따위의 맨 꼭대기, 2. 그 이상 더없는 최고의 상태, 3. 한 나라의 최고 수뇌라고 한다. 어쩌면 컨버그가 말한 정상이 ‘그 이상 더없는 최고의 상태’를 의미한 건 아닐까. 아, 그렇다면 굳이 범주를 다시 나눌 필요가 없겠군.


아니, 그나저나 내가 오늘 원래 쓰려던 글은 이런 글이 아니었는데 어쩌다보니 글이 엄한 산의 정상으로 와버렸다. 이게 글쓰기의 매력이지 뭐, 라는 다소 무책임한 합리화를 해버리고 싶다.

아니, 다시 한 번 아니. 생각해보면 계획과는 달랐지만, 그래도 내 머릿속에서 경험된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 과정에서 경험한 감정을 알아차렸고, 유쾌하게 나의 경험으로 통합했다는 사실에서 보면 심리학적 측면에서는 꽤나 성숙한 모습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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