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긴 혼잣말

이별이 무덤 밖으로 기어 나왔다.

by party noodle

8월 마지막 수요일 저녁에는 죽음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때 기억에 남는 질문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앞으로 영영 볼 일이 없게 된 사람이 생겼습니다. 당신은 아래의 보기 중 어떻게 생각하는 사람인가요?
1) 그 사람, 어디선가 잘 살고 있을 거야 2) 그 사람은 이제 나에게는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야.

반가운 질문이었다. 이와 비슷한 질문에 오랫동안 같은 답을 해왔는데, 최근 들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 변화를 혼자만 간직하기 아쉽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때는 간결하게 공유했던 답을 이 글에서는 마음껏 길게 해보려 한다.



그러려면 나의 첫 연애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대학교 2학년 때인가, 나는 난생처음으로 한 소개팅에서 나보다 여섯 살 많은 남자를 만났다. 우리는 한 달 동안 일주일에 한 번을 만났고, 네 번째 만났던 날 그가 잔뜩 긴장하며 한 고백을 시작으로 사귀게 되었다. 그는 내게 자주 사랑스럽다고, 예쁘다고 말해주었다. 그동안 집에서 늘 ‘이상한 애’로 취급되고, 뭘 해도 오빠의 그늘에 가려져서 못난이처럼 느껴지던 나에게. 그래서 그가 내게 해주는 말들이 쑥스럽고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나를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내 생각을 바꿔주고 싶었던 걸까. 그는 자주 반듯반듯한 글씨로 애정이 담긴 편지를 써주었고, 내가 무척 좋아하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랑한다 말해주었고, 나보다 먼저 태어나서 누려본 좋은 것들을 경험시켜 주었다. 어느샌가 ‘나 이만하면 꽤 사랑받을 만한 사람인가?’ 생각하게 되었다. 구박데기에서 슬그머니 신데렐라가 된 것처럼. 평생을 함께 붙어서 살아온 가족들에 비하면 그와는 찰나를 공유했을 뿐인데, 어느새 그가 나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


똑똑하고 성실했던 그와 사귀면서 내 성적도 바뀌었다. 그를 만나기 전, 아니 만난 이후로도 얼마간은 번번이 수업에 지각했고 기분 안 좋으면 자체 휴강을 때려버리는 나였다. 과제도 대충 해서 내고, 시험기간에는 도서관에서 공부 대신 핸드폰이 뜨거워질 때까지 게임이나 하느라 친구들에게 핸드폰을 압수당한 적도 있다. 당연히 성적이 엉망진창이었다. 그러나 그를 좋아하게 될수록 그에게 부끄럽지 않은 여자친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수업에 착실히 가고, 과제도 시간과 공을 들여했고, 시험공부도 이전보다 빡세게 했다. 입학 이후로 처음으로 성적을 확인하고 놀랐다. 내가 이런 학점을 다 받다니.


그와 연애하기 전까지 나는 평생 독신으로 살게 될 것이라고 (그때는 비혼이라는 말도 없었다.) 생각했는데, 그때 처음으로 누군가와 결혼을 하는 나를 상상했었다. 이 사람이라면 결혼을 할 수도 있겠다. 나보다 나이가 많고 착실한, 그래서 그 나이의 사람들에게 사회가 요구하는 과업을 성실히 수행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그가 나에게 자꾸만 대학교 졸업하면 결혼하자 어쩌자, 꼬셨기 때문에 나도 모르는 새에 세뇌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는 정말로 그와 내가 결혼할 줄 알았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이유로 우리는 2년을 살짝 넘긴 뒤 헤어지게 되었다. 그와 헤어지고 반년 뒤엔가 나는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갔다. 연수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2주 동안 뉴욕으로 여행을 갔는데, 어느 날 꿈에 그가 나왔다. 꿈속에서도 우리는 헤어진 지 일 년이 넘었는데 그는 여전히 질척대며 다시 만나자고 했다.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고, 이내 기분이 찜찜해졌다. 이별을 고한 것은 내 쪽이었고, 결정을 번복하지 않을 만큼 명확한 이유가 있었고, 그를 전혀 그리워하지도 않는데 어째서 이런 꿈을.


멍하니 앉아있는데 문득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나는 우리 둘을 소개해주었던 주선자 분께 오랜만에 메세지를 보냈다. 선생님, 잘 지내시죠? 블라블라, 핑퐁핑퐁, 그런데 혹시 OO오빠 결혼했나요? 제가 지금 여행 중인데 어제 그 오빠가 제 꿈에 나왔더라구요. 나의 뜬금없는 질문에 그녀는 어떻게 알았다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는 오 저 촉 좋네요 하고 웃어넘기는 답장을 보냈지만 실제로는 머리통을 흠씬 두들겨 맞은 듯 멍청한 기분이 들었다.


그날의 기억은 거기서 끝이 나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시간이 지난 뒤에 별안간 나는 페이스북을 캐고 다니며 그의 계정을 찾았다. 그의 페이스북 페이지와 함께 웨딩 사진도 발견했다. 그는 자기 또래로 보이는, 그리고 원했던 것처럼 탄탄하고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여성과 결혼한 듯했다. 열 장 조금 안되게 올라온 그 사진을 하나하나 구경했다.


슬프거나 화가 나거나 하진 않았다. 그냥 이상했다. 정말로 이상했다. 웨딩 사진이 아니라 영정 사진처럼 느껴졌다. 오래전에 죽은 사람의 사진을 보는 것 같았다. 그때 알았다. 아, 이별은 그 사람이 내 마음속에서 죽은 사람이 되는 것이구나. 기억에는 남아있지만, 더는 나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는 것. 더 이상 그 사람과 새로운 기억을 갱신할 수 없게 되는 것.


첫 연애와 이별의 경험은 너무나 강렬해서 그 이후의 연애와 이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남은 20대에 두어 번쯤 연애를 더 했고 또 먼저 이별을 고했다. 그러고 나면 자연히 그들을 내 마음의 무덤 속으로 생매장시키곤 했다. 이후에 만난 남자들 중 첫 남자친구만큼 임팩트를 준 인물은 없었기 때문에, 왜 이들을 죽여야 하는가 의문을 품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능숙한 킬러가 의뢰받은 일을 처리하듯 그들을 돌연사시켰다. 베테랑 장례지도사처럼 능숙하고 담담하게 그들을 보내줄 수 있었다.



서른이 된 이후로는 소개팅을 끊었다. 소개팅에서는 내가 원하는 사고방식을 지닌, 그리고 내가 앞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남자를 만날 수 없었다. 나와 같은 것이라고는 연애를 하고 싶다는 강한 동기가 있다는 것뿐, 그 외에는 비슷하거나 흥미로운 점이 없는 사람들만 만났다. 그때는 내가 나를 너무 몰라서, 주변에 나와 결이 다른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사람들만 소개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건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연애를 위한 연애, 나아가 결혼을 위한 결혼이 무용하다 생각하는 사람이다. 시간 쓰고 돈 쓰며 공허하고 인위적인 만남을 갖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나와 비슷한 사람을 찾는 것이 더 승산이 높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생각이 맞았다.



그와는 글쓰기 모임에서 만났다. 그와 처음 만났던 날이 아직도 기억난다. 자기소개를 할 때까지만 해도 눈에 띄지도 않았던 그가 낮고 부드러운, 게다가 약간의 경상도 억양이 섞인 목소리로 자신이 쓴 시를 읽던 순간이. 그때 나는 숙취로 헤롱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조용조용 차분하게 글을 낭독하는 그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뭐지? 저 사람? 흥미가 생겼다가 사그라들었다가 언제부턴가 매주 나오는 그를, 그의 글과 목소리를 기다리게 되었다.


관찰을 하면 할수록 그의 글과 말 속에서 내가 보였다. 저건 나다, 남자버전의 나다. 그것을 인식한 순간부터 그를 더 알고 싶었다. 훨씬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러나 몇 번의 엇갈림이 있어 애써 마음을 내려놓았다. ‘진짜 인연이면 어떻게든 기회가 생기겠지.’ 내 어른스러움에 탄복한 하늘은 어느 날 기회를 내려주었고, 나는 그것을 잽싸게 붙잡고 용기와 행동을 더해서 소망을 현실로 만들었다.


그와는 진심으로 재미있게 연애했다. 많은 순간을 그와 함께 했다. 수많은 질문과 답을 주고받았고, 온갖 실없는 짓과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성숙한 일도 많이 했다. 자주 웃고 때때로 울었다. 내가 어떤 강렬한 감정을 표현하면 그는 그 감정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거나, 이 순간을 오래오래 기억하라고 말해주었다. 그와 사귀는 동안 나는 정말 많이 변했다. 첫 연애를 할 때와는 다른 차원으로 변했다. 변한 정도가 아니라 거의 30여 년 동안 묻혀 있던 나를 새롭게 발굴해 준 것에 더 가까웠다. 그는 다양한 방식으로 나를 비춰주었다. 나는 그를 만나면서 나를 만났다.


사랑을 의심하기도 했다. 이전 남자친구들과 한 것은 모두 사랑이 아닌 것 같았다. 헤어진 남자친구들을 찾아가 사랑이 뭔지도 모를 때 그들에게 남발했던 “사랑해”라는 말을 모두 거두어 오고 싶었다. 이 관계에서 경험하는 것을 기반으로 사랑의 정의를 다시 내리고 싶었다. 내 삶에서 새로 쓰인 사랑을 배우고 경험했다. 진심으로 결혼이 하고 싶어졌다. 이번에는 ‘결혼을 한다면 이 사람이랑 해야겠지’가 아니었다. 그와 함께라면 어떤 현실이 눈앞에 닥쳐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와 결혼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는 3년을 살짝 넘기고 헤어졌다. 그가 헤어지자고 말했다. 나를 감당할 수 없다고 했다. “살면서 나를 이렇게 많이 사랑해 준 사람은 네가 처음인데, 나는 아직도 사랑이 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앞으로 연애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그 말에 화가 나기보다는 슬프고 미안했다. 내가 너에게 배운 것을, 왜 나는 너에게 가르쳐주지 못했을까. 자존심을 다 내팽개치고 몇 번이나 그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와 이별한 날, 우리 집 벽이 상당히 얇다는 것도 까맣게 잊고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살면서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프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하필 만우절에 헤어져서 그 이별은 오랫동안 거짓말 같았다. 이전의 이별들처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오래 일한 장례 지도사처럼, 능숙한 킬러처럼 그를 내 마음속에서 죽이고 장례식을 치르는 일이 너무나 어려웠다.


헤어지고 몇 달이 지난 뒤 카카오톡 숨긴 친구 목록에 넣어둔 그의 프로필 사진이 한 영화의 스틸컷으로 바뀐 것을 봤다. 다음날 혼자 영화관에 가서 그 영화를 보고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펑펑 울었다. 그가 또 보고 싶었다. 감정이 널뛰었다. 이별을 부정하는 마음이 지나가면 분노가 치솟았다. 그래놓고 얼마 간 시간이 지난 뒤에는 또 불쑥 그가 보고 싶어졌다. 집 앞에 찾아가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서 찾아왔다고 말하고 싶었다. 참다못해 그의 생일에는 축하 메세지를 보냈다, 속도 없이. 따뜻하지만 거리감이 상당한 답장에 현타와 슬픔을 세게 느꼈다.


다른 남자친구를 사귈 때까지, 심지어 새로운 남자친구와 헤어진 이후까지 나는 끝내 그를 죽이지 못했다. 대기표 1번을 받은 사람이 창구를 지키고 있어서, 대기표 2번을 받은 남자의 죽음도 미뤄졌다. 죽이고 살리고를 여러 차례 반복하는 사이 나는 30대가 된 이후 세 번째 연애를 했다. 번개처럼 빠르게 지나간 실속 없는 인연이 죽음의 대기표 3번을 받을 때까지도 첫 번째 남자는 다음 순서를 내어주지 않았다.


나는 결국 그가 감명 깊게 본 영화 속의 주인공과 같은 방식으로 썰물 시간에 맞춰 내 마음속 모래사장에 깊은 구덩이를 팠다. 깊은 구멍 속에 그를 빠뜨린 뒤 파도를 철썩이며 밀물을 불러왔다. 죽어라, 이번에는 제발 죽어라. 그러나 역시나 그는 죽지 않았다. 거듭된 실패에 무기력해진 채 몇 달을 흘려보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어쩌면 이게 이별에 대처하는 적절한 방법이 아니었나 봐.


그날로 나는 세 명의 남자들에게서 대기표를 거둬들인 뒤 갈가리 찢어버렸다. 그랬더니 과거의 죽은 남자친구들까지 스르륵 부활했다. 나는 더 이상 이들과의 이별을 죽음과 동일한 것으로 여기지 않기로 했다. 이별은 그저 자연스러운 만남과 헤어짐이었다. 내 삶에서 그의 역할이 다한 것.


그동안 열연해 줘서 고마웠어요. 이제 대본은 여기 놓고 저 문으로 나가면 돼. 출연료는 촬영하는 동안 챙겨준 걸로 충분하지? 다른 배역을 맡아도 너는 분명 잘 해낼 거야. 잘 지내.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진심으로.



드디어 이별이, 무덤 밖으로 기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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