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엄마의 손목이 부러졌다. 오전에 멀쩡하게 나갔던 사람이 귀가 시간을 한참 넘기고서야 집에 돌아왔다. 오른팔에는 두툼한 붕대를 감고 어깨에 보호대를 차고서. 깜짝 놀라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탁구를 치다가 라켓을 쥔 채로 넘어지면서 땅을 짚었다고, 그 바람에 손목의 큰 뼈가 골절되었단다.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다녀왔고, 당장 다음날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통증이 아주 심한 것은 아니었는지 엄마는 “아빠가 한소리 하겠다”라고 말하며 멋쩍게 웃었다. 나는 사람이 다쳤는데 누가 거기에 한 소리를 하냐고 대꾸했다. 나중에 물어보니 퇴근하고 돌아온 아빠는 엄마에게 한소리 하는 대신 ‘언젠가 그럴 줄 알았다’며 허허 웃어버렸다고 한다.
다음날도 아빠는 출근을 해야 했다. 자연스럽게 내가 엄마의 보호자 역할로 병원에 따라갔다. ‘엄마의 법적 보호자인 아빠가 떡하니 있는데 내가 가는 게 맞나?’라는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지만, 수술 전 검사를 할 때부터 퇴원하기까지 많은 시간을 엄마 곁에 있어 보니 아빠보다는 내가 보호자 역할을 한 것이 잘한 일처럼 생각되었다. 아빠보다 섬세하고 편안하게 엄마의 수발을 들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평소에 바쁘다는 이유로 미뤄온 대화도 나누고, 엄마의 말과 행동을 관찰하면서 엄마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된 것도 있었으니까.
나는 지금까지 엄마가 대체로 씩씩하고 긍정적인 사람인 줄 알았다. 정말로 그런 사람이었을 수도 있고, 가족들이 그렇게 믿도록 위장을 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언젠가는 씩씩하고 긍정적이었지만, 어느 순간 성격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냥 내가 멋대로 엄마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해 버렸을 수도 있다.
작년 3월에는 내가 헬스장 샤워실에서 미끄러져 다친 일이 있었다. 붓고 멍든 광대뼈와 시커멓게 멍이 든 허벅지를 엄마에게 보여주자 엄마는 무척 침착하고 담담하게 “얼굴뼈가 으스러지거나 머리를 다친 게 아닌 게 어디냐”며 위로했다. “엄마는 아주 큰일이 아니면 늘 이만하면 다행이다라고 생각해. 이만하면 다행이야, 상처도 금방 가라앉을 거야. 엄마가 보면 다 알아.”하고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그러나 올해 3월의 엄마는 그러지 못했다. 다친 정도가 다르고, 다친 사람이 자신이라 그랬는지 몰라도 아주 달랐다. 작년 엄마의 말대로라면 다행히 아주아주 심각한 부상은 피했기 때문에 ‘이만하면 다행이다’라고 할 법도 한데, 엄마는 절대로 그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참 별일이다, 어떻게 이렇게 다칠 수가 있니?”라는 말과 “괜히 내가 다쳐서 가족들만 고생시키네.”하는 말만 몇 번이고 반복했다. 마치 자신은 절대로 다칠 일이 없는 사람이었던 것처럼, 자신에게 절대 일어나면 안 될 일이 일어나 버린 것처럼 불편해하고 미안해했다.
수술을 마친 뒤에는 몽롱하고 지친 듯한 표정으로, 간호사의 부축을 받으며 비척비척 병실로 돌아왔다. 전날 밤부터 12시간이 넘도록 금식을 한 데다 마취가 덜 풀려서인지, 수술하러 가기 전보다 움직임이 굼떴다. 침대에도 힘겹게 누워서는 왠지 모르게 슬픈 얼굴로 계속 자신의 오른손을 만지작거리며 혼잣말을 했다. “오른쪽 팔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어. 축축 쳐져서 도저히 가눌 수가 없네.” 나는 마취의 힘이 참 대단하다, 생각하면서 최대한 열심히 위로했다. “엄마, 오른팔 아주 잘 붙어있어. 술 취한 사람 생각해 봐. 힘 쭉 풀리면 원래 엄청 무거워지잖어.”
자신의 부상을 인정하지 못하고, 적응하지 못하고, 좀처럼 기운이 나지 않는 엄마를 지켜보면서 생각했다. 오른팔과 손의 기능을 잠시 상실한 것만으로 무척 혼란스러워하고 힘겨워하는 이 사람에게, 재작년에 마주한 당신 동생의 죽음은 얼마나 커다란 충격과 슬픔을 주었을까. 어쩌면 엄마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외삼촌의 죽음과 부재를 힘겹고 고통스럽게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감정 표현이 서툴고 투박한, 그래서 어설프게 말하기보다는 아예 침묵하기를 선택하고 마는 엄마의 마음속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일어나고 있을까.
나와 가족들은 엄마의 손목 부상도 외삼촌이 돌아가신 일과 아주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엄마는 내가 이전부터 몇 번이나 “제발 운동해~”라고 말했음에도, 몇 번이고 “해야지~” 대꾸만 하고 절대로 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엄마가 갑자기 운동을 다니기 시작한 건 외삼촌이 돌아가신 뒤 며칠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중간이 없는 그녀는 동네 주민센터에서 라인 댄스와 탁구 수업을 등록했다.
너무 무리를 하는 것 같아서 “엄마, 괜찮아? 슬플 땐 그 감정을 외면하려 하지 말고 좀 느껴야 한대.”하고 조심스레 말했을 때에도 엄마는 씩씩하게 말했다. “자꾸 생각하면 우울해지기만 하고 눈물 나서 싫어. 운동할 때는 집중하니까 아무 생각 안 나고 좋아. 건강해지기도 하고." 그 말이 이해가 되긴 했지만 무릎이 좋지 않은 엄마에게 별로 좋지 않은 운동이라고 생각되어서 ”이참에 수영을 배워보는 건 어때?"라고 물었다. 엄마는 물이 무섭다는 이유로 차라리 아픈 무릎을 더 혹사시키기를 선택했다.
그때부터 엄마는 일 년이 넘도록 더우나 추우나 부지런히 운동을 나갔다. 월요일과 수요일은 라인 댄스, 화요일과 목요일은 탁구, 금요일은 라인 댄스와 탁구. 어쩌면 엄마에게는 무릎이 아프고 몸이 고단한 것보다, 이따금씩 인식하게 되는 동생의 부재와 그와 견딜 수 없이 밀려오는 슬픔이 훨씬 더 참기 어려웠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삼촌이 돌아가신 무렵에는 나 또한 부모님 집에서 살지 않을 때였으므로, 아빠가 출근해 있는 오전 시간 동안 운동도 가지 않고 텅 빈 집에 홀로 앉아 있었다면 엄마는 심리적으로 훨씬 더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걸으면서, 센터에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웃으면서, 춤 동작에든 빠르게 튀어 오르는 공에든 집중하면서, 자신의 괴로움을 필사적으로 외면했던 것 같다. 그러다 결국 이 사달이 나버린 것이다.
이번 주 애도 상담 수업에서 복잡한 사별이라는 개념을 배웠을 때,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지연된 슬픔은 외삼촌의 죽음을 대해 온 엄마의 모습 그 자체였다. 잠재되거나 억눌린, 또는 연기된 슬픔. 고인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사별에 대한 정서 반응을 겪긴 했지만, 그 정도가 충분하지 못하여 미래의 어느 날 어떠한 계기로 사별 슬픔의 증상과 마주하게 되어버리는 것.
외삼촌의 장례식 때 엄마는 남동생을 잃은 누나가 아니라, 마치 엄마를 잃은 아이처럼 울었다. 눈도 뜨지 못할 만큼 커다란 눈물방울을 끊임없이 흘리고, 가슴을 쥐어짜듯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너까지 떠나버리면 어떡해, 나 혼자 어떻게 살아가라고." 장례식을 마치고 현실로 돌아온 뒤에는 엄마는 그렇게까지 우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생각해 보면 엄마는 20대부터 60대까지, 10년에 한 번씩은 언니와 오빠, 아빠와 엄마, 끝내는 동생과도 이별을 한 사람이다. 자신의 삶 속에서 상실의 경험이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더 크게, 더 자주 목놓아 울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엄마는 그들과의 영원한 이별을, 그로 인한 슬픔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몰랐다. 장례식이 돌아올 때에만 오랫동안 마음속에 삭혀둔 감정을 펑펑 쏟아내듯 오열했다. 현실의 삶 속에서는 무시로 자신을 덮쳐오려는 외로움을, 허망함을, 공허감을 피하려고 애썼다.
뒤늦게 무의미한 질문을 하게 된다. 엄마가 장례식을 마치고 현실의 삶으로 돌아와서도 종종 그들과의 추억을 회상하고 감정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떠난 이들을 더 충분히 애도했더라면, 엄마가 손목을 다치는 일은 없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엄마의 손목이 더 이상 도망치지 말라는, 이제는 정말로 미뤄둔 감정들을 마주해야 한다고 신호를 주는 것 같다고 짐작만 할 뿐이다.
*본문 내의 "복잡한 사별" 개념은 <애도의 심리학 : 고통에서 회복으로 나아가는 희망의 여정> 양준석 외, 북랩, 2025을 인용하여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