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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사주 Feb 23. 2017

세금은 별 볼일 없는 사람이나 내는 것이다

#조세피난처_지금, 여기 와 있지만 제대로 논의되지 못한 이슈들

최근 케이만군도가 9조가 넘는 국내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와 충격을 줬습니다. 카리브해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가 어떻게 외국인 주식 보유액의 2%에 가까운 금액을 투자한 것일까요. 바로 조세피난처였기에 가능했습니다. 세금 회피를 목적으로 케이만군도에 '유령회사(페이퍼컴퍼니)'를 만들어 다시 자금을 국내로 들여온 것입니다. 외국인으로 위장해 각종 세금을 회피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최근 최순실도 유럽의 조세피난처에 거액의 자산을 숨겼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뉴스의 배경>은 국내외 기업들과 거액자산가들의 은밀한 공간이자 국가 경제의 근본을 위협하는 조세피난처를 다뤘습니다. 



조세피난처Tax Haven 소득세나 법인세가 아예 없거나 15퍼센트 이하인 국가와 지역


좀더 구체적으로는 세금이 전혀 없는 ‘조세천국(Tax Paradise)’, 아주 미미한 세금만 부과하는 ‘조세보호소(Tax Shelter)’, 특정한 기업이나 사업활동에 세금상의 특전을 인정하는 ‘조세휴양지(Tax Resort)’로 나눌 수 있다. 자금의 출처나 소유주에 대해서는 철저히 비밀주의를 고수한다. 


조세천국의 대표 지역은 바하마, 버뮤다, 케이맨제도 등이고, 홍콩, 파나마, 라이베리아는 조세보호소로 이름이 높다.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스위스 등은 믿음직한 조세휴양지로 정평이 나 있다. 다들 일찍부터 유럽의 조세피난처로 기능했거나, 과거 대영제국을 기반으로 느슨하게 형성된 영국의 영향권이거나, 현재 미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국가들로써, 그 자체로 조세피난처의 성격을 정의한다. 즉 조세피난처는 1세계/상류층/자본가들이, 세금 없이 은밀하게 돈을 세탁하고 모을 수 있도록 돕는 곳이다. 


프랑스혁명 때 처음 등장했다

실제로 조세피난처는 1789년 프랑스혁명 때 처음 등장했다. 당시 귀족들이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재산을 지키고자 일정 수수료를 주고 스위스 은행에 비밀 금융 서비스를 받은 것이 시초가 되었다. 이후 모나코, 버뮤다 등 이렇다 할 산업기반이 없는 카리브해와 오세아니아 작은 섬나라들로 확대되었고, 1차 세계대전 때 유럽 각국이 전쟁비용을 마련하느라 세율을 올리고부터는 본토에도 하나둘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1920년대 영국은, 런던에 본사를 두고 외국에서 기업 활동을 하는 회사는 영국의 조세 대상이 아니라는 법원 판결 덕분에 유럽의 새로운 조세피난처로 떠올랐다. 1930년대 스위스는, 은행이 고객의 신분을 노출하는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는 법률을 제정, 비밀주의를 강화하며 주가를 높였다. 리히텐슈타인, 오스트리아, 벨기에, 아이슬란드도 슬금슬금 대열에 합류했다. 미국은 1980년대부터 네바다, 델라웨어, 몬태나, 사우스다코타 주의 세율과 기업 인허가 조건을 대폭 낮춰 자국 내 조세피난처를 마련했다. 그 결과, 델라웨어 주를 예로 들면, 인구 90만 명에 불과한 이곳에 94만 개 기업이 들어섰다. 대도시 단층 건물에 월마트, 제너럴모터스, 애플, 뱅크오브아메리카, 포드, 구글 등 수만 개 대기업이 서류상 법적 주소지로 등록돼 있는 일도 허다해졌다. 


개인과 기업이 전 세계 약 60군데에 마련된 조세피난처를 이용해 돈을 빼돌리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다국적 기업이 자회사간의 거래를 통해 수익이 나는 곳에는 비용을 이전시켜 수익 규모를 줄이고, 조세피난처에는 그 수익을 이전시켜 양쪽에서 내는 세금을 줄이는 ‘이전가격(transfer pricing)’은 기본 중 기본이다. 


미국에 본사가 있는 다국적 기업이 온두라스 바나나를 사서 영국에 팔았다고 하자. 상품의 이동경로는 ‘온두라스→(다국적 기업 운송)→영국’으로 매우 단순하다. 하지만 조세문제는 그렇지가 않은데, 어디서 이익이 발생하고 귀속되는지가 영 애매하기 때문이다. 이 틈을 노려 다국적 기업은 구매망은 케이맨제도에, 금융 서비스는 룩셈부르크에 근거를 둔다. 상표는 아일랜드에 등록하고, 운송은 맨 섬, 경영은 저지, 보험은 버뮤다 자회사가 담당한다. 물론 이 회사들은 대개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페이퍼컴퍼니paper company’이거나, 자산도 활동도 없는 ‘쉘컴퍼니shell company’다.

 

사업이 시작되면 룩셈부르크의 금융 자회사는 온두라스 자회사에 대출을 하고 이자로 연 2,000만 달러를 부과한다. 온두라스 자회사는 이 돈을 ‘비용’으로 처리해 전체 소득 규모를 줄이고 세금을 회피한다. 그러나 룩셈부르크 자회사가 이자로 받은 2,000만 달러 초과 이득은 룩셈부르크에서 적용되는 저세율에 따라 아주 조금만 과세된다. 세금고지서는 사라지고, 자본은 손쉽게 역외로 빠져나간다.1 


세금은  별 볼일 없는 사람에게나 통용되는 것이다


이런 ‘꼼수’들은 얼핏 국가마다 서로 다른 세법을 이용한 ‘효율적인’ 자금 운영처럼 보인다. 조세피난처 옹호론자들의 핵심 논지도 이거다. 더불어 “자본은 경제성장의 씨앗”이며 “씨앗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자살행위와 같다”라는 게 주요 레퍼토리다. 


그러나 영국의 글로벌 정치경제 분석가 니컬러스 색슨은, 조세회피만큼 비효율적인 게 없다고 말한다. 앞서 예로 든 바나나 사업을 보자. 조세회피로 인해 바나나 품질이 좋아졌나, 값이 싸졌나. 부의 이전만 일어났지 아무 것도 나아진 게 없다. 그것도 가난한 나라에서 세입으로 빠져나와 부자 나라로 흘러들어가는 통에, 국가 간 불평등만 심화되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다국적 기업은 온두라스 시민들이 세금으로 구축한 사회 인프라를 이용한다. 정부가 제공하는 혜택은 혜택대로 누리고, 돈은 돈대로 벌고, 세금은 세금대로 안 내면서, 누릴 건 다 누리는 것이다. 


1세계 시민들은 ‘이게 다 가난하고 힘없는 나라에서 태어난 죄’라며 냉소하겠지만, 알고 보면 그들도 똑같은 피해자다. 조세피난처 덕에 영국과 미국 등 선진국들의 세금고지 총액도 날로 감소 추세이고, 그 부족분은 일반 시민이 메울 수밖에 없다. “세금은 별 볼일 없는 사람들에게나 해당하는 것이다”라는 미국 부동산 재벌 리오나 헬름즐리의 발언은 어디서나 통용된다. 


세금이 적을수록 경제가 성장한다는 주장도 터무니없다. 세금과 경제성장의 반비례관계를 증명할 증거가 없을뿐더러, 설령 세금을 낮춘다 해도 건전한 투자자금보다는 단기성 투기자본인 ‘핫머니’를 끌어오는 경우가 많아서 경제성장은커녕 부실화될 위험이 더 크다. 

무엇보다 자본은, 금융자본만 있는 게 아니다. 사회 구성원들이 신뢰를 바탕으로 협동하도록 하는 ‘사회자본’도 있으며, 세금이 바로 그 기반이 된다. 결국 조세회피는 ‘부의 재분배’라는 세금의 기능을 마비시키고, 조세정의를 훼손하고, 사회자본이 형성되는 일을 저해한다. 실제로 금융규제가 완화되고 조세회피가 부유층에 일반화된 1970년대 이후, 부의 쏠림 현상과 불평등은 가속화되었다.2 


한국의 역외탈세 액수는 국가예산의 두 배가 넘는다


2012년 영국 조세정의네트워크의 보고서를 보면, 2010년 말 최소 21조 달러(약 2경 4,200조 원)가 조세피난처에 유입되었다. 미국과 일본의 경제규모를 합한 것과 비슷한 이 돈은 개발도상국의 역외도피자금만 집계한 것으로, 선진국까지 더하면 세계 GDP의 30퍼센트를 웃돌리라 예상된다. 이로 인해 각국 정부가 입는 세금 피해액은 연 1,900∼2,800억 달러. 의료복지에 쓴다면 다섯 살 미만 어린이를 하루 5,000명 이상 치료할 수 있는 액수다. 참고로 한국은 개발도상국 역외탈세 자금규모 순위에서 중국, 러시아에 이어 3위에 올랐다. 액수는 약 892조 원으로, 2016년 국가예산(386조 7,000억 원)의 두 배가 넘는다. 


조세포탈이 나날이 지능화되고 그 규모 또한 커지자, 2012년 OECD는 G20과 함께 다국적 기업이 각 나라 조세제도의 이점만을 취해 관련 국가의 세원을 잠식하고, 과세 소득을 부당하게 이전시키는 행위를 근절하기 위해 ‘다국적 기업의 소득이전을 통한 세원잠식(BEPS, Base Erosion and Profit Shifting)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이어 2015년 10월 조세조약 남용 금지, 유해 조세제도 폐지, 이전가격 세제 강화 및 문서화 등 15개의 국제적 공동대응 방안을 담은 「BEPS 관련 15개 액션 플랜」 최종보고서를 발표하고, 11월 G20 정상회의에서 승인했다. 2016년 5월 현재, 한국과 미국을 제외한 39개 회원국이 협정에 서명했다. 



파나마 페이퍼스Panama Papers 파나마 최대 로펌 ‘모색 폰세카’가 40여년 간 전 세계 1만 4,000여 명의 역외탈세를 도운 사실이 담긴 문건 

 

2016년 4월 3일, 미국 워싱턴의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는 모색 폰세카가 1971~2015년까지 고객들을 위해 조세피난처에 역외회사를 설립해준 내역이 담긴 문건 1,150만 개를 입수했다. 이어 영국 BBC와 가디언, 프랑스 르몽드, 호주 ABC, 한국 뉴스타파 등 전 세계 109개 언론사와 공동으로 “파나마 페이퍼스”라는 탐사보도 프로젝트를 꾸리고, 5월 9일 해당 자료와 데이터베이스를 무료 공개했다. 이로써 200여 국가, 21만 4,880개 역외회사, 1만 4,153명이 얽힌 초대형 조세포탈 스캔들이 세상에 폭로되었다. 


파나마 페이퍼스는 ‘역대급’ 규모와 액수만으로도 충격이었지만, 각국의 전·현직 정상(12명)과 친인척(60명), 고위 정치인과 관료(128명), 『포브스』에 매일 이름이 오르내리는 슈퍼리치(29명), 내로라하는 운동선수와 연예인 등 사회지도층과 유명인사가 대거 포진했다는 점에서 사회적 충격이 더욱 컸다. 또한 세 군데 역외회사가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의 군대에 연료를 공급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조세피난처의 해악이 단지 탈세만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시민들의 배신감과 허탈감, 분노를 다독이고자 각국 정부는 부랴부랴 관련 인사들에 대한 조처에 들어가야 했다. 

 

아이슬란드 총리 시그뮌뒤르 다비드 귄뢰이그손은 파나마 페이퍼스가 공개된 지 이틀 만에 사임했다. 영국 총리 데이비드 캐머런은 자신과 부친의 탈세 혐의를 해명하기 위해 직접 수사 태스크포스 구성을 지시했다. ‘부패 척결’이 주요 공약이었던 아르헨티나 대통령 마우리시오 마크리와, 자녀들의 역외탈세 의혹에 휩싸인 파키스탄 총리 나와즈 샤리프는 검찰 조사를 받았다. 아르헨티나 축구선수 리오넬 메시는 총 350만 유로 벌금과 21개월 집행유예를 확정했다. 


푸틴 "나와는 무관한 일, 미국이 꾸민 음모"


‘개도국 역외탈세 트로이카’ 한국, 중국, 러시아는 각각의 방식으로 상황에 대처했다. 195명의 명단을 받아 든 한국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 노재헌이 버진아일랜드에 페이퍼컴퍼니 열 개를 만든 사실을 확인하고 사돈인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관계가 있는지 조사에 들어갔으나 여태 감감무소식이다. 가까운 지인이 2조 원이 넘는 돈을 해외로 빼돌린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나와는 무관한 일이며, 이 모두가 선거를 앞두고 나를 공격하기 위해 미국이 꾸민 음모”라고 주장했다.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SNS를 차단하고, 누나 내외를 비롯해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전·현직 위원들의 대규모 조세포탈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 


한편 돌풍의 중핵 모색 폰세카는 성명을 통해 “지난 40년 간 단 한 번도 범죄와 연관된 일을 저지른 적이 없다”면서 탈세를 도운 혐의를 부인했다. 


참고


1 니컬러스 색슨 저, 이유영 역, 『보물섬』, 부키, 2013.

2 니컬러스 색슨,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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