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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사주 Mar 02. 2017

좀비는 스펙터클이고 알레고리고 재미다

#좀비_지금, 여기 와 있지만 제대로 논의되지 못한 이슈

좀비가 떠돌고 있습니다. 작년 영화 <부산행>의 흥행에 이어 드라마 <시그널> 김은희 작가의 신작도 좀비물로 알려졌습니다. 좀비 사극 영화도 곧 제작된다는 소식입니다. 영화, 드라마뿐 아니라 게임에서도 좀비의 활약은 두드러집니다. <바이오하자드> <레프트 4 데드>가 대표적입니다. <나는 전설이다> <세계대전Z> <웜바디스> 등 좀비 소설은 셀 수도 없습니다. B급 영화의 단골 메뉴에 불과했던 좀비가 대중문화의 '핫'한 소재로 등장한 것입니다. <뉴스의 배경>은 좀비의 흥행, 그 창궐을 짚었습니다. 시작은 부두교입니다. 



부두교Voodooism 자연과 인간사를 관장하는 여러 수호정령들을 숭배하는 서아프리카 종교


부족과 씨족으로 구성된 아프리카 사회의 특성과 기복신앙이 결합된 것으로, 서아프리카 베냉인민공화국의 남부 도시 우이다가 요람이다. 자연과 부족/씨족의 조상들이 인간사 길흉화복을 좌우하는 수호정령이 되고, 이들을 잘 받들어 모시면 복이 온다고 믿는다. 


아프리카의 평범한 원시종교에 불과했던 부두교는 서구 제국주의와 만나며 얼마간 변질되는데, 특히 아이티에서 두드러졌다. 오늘날 ‘부두교’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 즉 닭 피를 뒤집어 쓴 사제와 신도들이 접신 상태로 춤추고 노래하다가 집단 엑스터시에 빠지는 모습은 모두 아이티 부두교에서 연원한다. 


시작은 노예무역이다


왜 하필 아이티인가. 사연이 눈물겹다. 베냉의 전신은 15~19세기 대서양 연안의 도시들을 지배했던 다호메이 왕국으로, 16세기부터 정복전쟁에서 노획한 포로들을 서구에 노예로 팔아 재정을 충당했다. 토고, 가나 등 인근 왕국들도 이에 동참하면서 기니 만(Gulf of Guinea, 일명 ‘노예해변Slave Coast’)은 일찍부터 ‘노예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 라틴아메리카의 푸른 섬, 아이티는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다녀가고서 곧장 스페인 식민지로 전락했다. 정복자들은 원주민들을 사탕수수밭에서 강제 노역시키거나 죽였다. 그 결과 1493년 800만 명이던 원주민 수는 1500년경 10만 명으로 급감했고, 1542년에는 겨우 200명만이 남았다. 


노예로 부릴 원주민들이 사라지자 스페인 정복자들은 아프리카로 눈을 돌렸다. 2인 1조로 족쇄를 찬 아프리카인들이 매일처럼 기니 만에서 아이티로 보내졌다. 90여일을 항해하는 동안 죽어나가는 자가 부지기수라, 당시 노예선은 ‘떠 있는 무덤’으로 불렸다. 


‘아이티=부두교=흑마술=좀비’라는 편견어린 공식


간신히 아이티에 도착한 아프리카인들은, 혹여나 한데 뭉쳐 반란이라도 일으킬까봐 노역지 여기저기로 분산배치돼 짐승처럼 살았다. 다만 그 와중에도 가톨릭에 한해 종교를 갖는 것은 허용되었다. 인내와 복종의 교리가 노예제도를 정당화시킬뿐더러, 자유와 고향에 대한 노예들의 갈망을 꺾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프리카인들은 성상 숭배 같은 가톨릭 의례 속에 부두교 의례를 교묘히 섞어 고유의 신앙과 문화를 지켰다. 아이티 부두교가 발원지와 사뭇 다른 색채를 띠게 된 사정이다. 


최면 같은 의식을 치르면서 아프리카인들은 향수병을 달래고, 억눌렀던 분노와 설움을 쏟아내고, 공동체의 결속과 자유의지를 다졌다. 하지만 이런 맥락을 알 리 없는 서구의 선교사와 인류학자들 눈에는 그저 야만인들의 악마적인 주술행위로 비칠 뿐이었다. ‘아이티=부두교=흑마술=좀비’라는 편견어린 공식이 자연스레 도출되었고, 영화 등 대중매체를 통해 단단해졌다.1 1955년 프랑스 문화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슬픈 열대』를 펴내기 전까지 아이티에 대한, 부두교에 대한, 타자에 대한 서구의 시선과 이해는 줄곧 이런 식이었다. 다호메이의 정령을 지칭하는 ‘보둔Vodun’에 영어로 물신物神을 뜻하는 ‘페티시즘fetishism’을 더한 부두교Voodooism라는 말은, 그 자체로 식민주의의 유산이었다. 


아이티의 아프리카인들은 1791년 봉기했다. 인간 보편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한 프랑스혁명 정신에 따라 장장 12년 간 스페인, 영국, 프랑스 식민지배자들에 맞선 끝에, 1804년 아이티는 라틴아메리카 최초의 독립국이 되었다.2


베냉공화국은 부두교를 공식 종교로 인정한다

부두축제는 1847년부터 열렸다. 일설대로라면 그해 소도라는 작은 마을에 ‘카르멜 산carmel mount의 성모’3가 발현해 병자들을 치유하는 기적을 행했다. 이후 그곳 폭포에 몸을 씻으면 병이 낫고 죄가 사해진다는 믿음이 퍼지면서, 소도는 가톨릭과 부두교 모두에 중요한 성지가 되었다(부두교의 우두머리 정령은 뱀의 화신 ‘담발라’이고, 담발라의 원천은 폭포다). 이때부터 아이티는 매해 7월 16일부터 사흘간 성모의 기적을 기리는 종교 페스티벌을 열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소도 부두축제’다.    


이에 질세라 부두교의 ‘본산’ 우이다도 축제를 기획했다. 1996년 베냉공화국은 부두교를 공식 종교로 인정한 데 이어, 1월 10일을 ‘전통의 날’로 명명하고 부두교와 전통문화를 기념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곧 ‘국제 부두축제’다. 해마다 1월 10일이 되면 부두교인들은 우이다에서 함께 가무를 즐기면서, 지난날 노예로 끌려가 죽은 이들을 추모하고, 음침한 부두교 이미지를 쇄신하고, 아프리카 전통문화의 가치를 되새기고자 애쓰고 있다. 



좀비zombie 흑마술을 행하는 부두교 주술사에 의해 죽었다 되살아난 사람

 

속설에 따르면 부두교에는 흑마술과 백마술이 있고, 좀비는 그중 흑마술의 산물이다. 좀비화 프로세스는 다음과 같다. 먼저 주술사가 멀쩡한 사람에게 약을 먹여 죽은 것처럼 위장한다→가족이나 지인이 깜빡 속아 장례를 치른다→주술사가 밤에 몰래 ‘산송장’을 끌어내 약을 먹여 살린다→깨어난 사람은 연이은 충격과 약물 투여로 인해 제정신을 잃은 ‘좀비’가 된다→좀비를 데려다 농장 노예로 부린다. 


척 봐도 말이 안 되는 설정 투성이지만, 그래도 일말의 진실이 있다. 아이티 흑인들이 좀비로 느껴질 정도로 착취당했다는 것, 생사의 권한마저 빼앗긴 채 산송장으로 살았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좀비는 인간의 존엄을 잃은, 영원한 노예의 삶을 강요당한 자에 대한 은유였다. 하지만 『슬픈 열대』는 물론이고 ‘오리엔탈리즘’이란 개념조차 없었던 시절, 부두교와 좀비는 문명화된 서구에서 볼 수 없는 야만, 신비, 비이성의 표상으로 소비되었다. 1932년 할리우드가 제작한 최초의 좀비영화 <화이트좀비>가 그 한 예다. 


지옥이 꽉 차는 날, 시체들이 땅 위를 걷게 될 것이다


주술사의 희생양, 얼빠진 몽유병자 같던 좀비를 지금의 모습으로 특징지은 사람은 미국 영화감독 조지 A. 로메로다. 1968년 로메로는 리처드 매드슨의 단편소설 『나는 전설이다』에서 영감을 얻어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만들었는데, 여기서 좀비는 이전과 전혀 다른 존재로 등장한다. 스스로 무덤을 찢고 나와, 떼 지어 다니면서, 살아있는 인간을 마구 물어뜯어 감염시키는 존재로! 죽은 사람이 어떻게 움직일까 하는 의문에는 흑마술만큼이나 신비주의적으로 대처했다. “지옥이 꽉 차는 날, 시체들이 땅 위를 걷게 될 것이다.”4


저예산으로 뚝딱 찍은 B급 공포영화가 뜻밖에 호응을 얻으면서, 로메로의 단발성 기획은 시리즈물로 이어졌다. 좀비에 물리면 좀비가 된다는 설정, 가까운 가족이나 지인이 좀비로 변하면서 생존자들이 겪는 내적 딜레마, 살아남은 사람들간의 갈등 등 좀비물의 주요 관습이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시체들의 새벽> <시체들의 낮> 등 ‘시체 3부작’에서 결정되었다. 


좀비가 이런저런 은유로 본격 읽히기 시작한 것은 그중 두 번째, <시체들의 새벽>부터였다. 베트남전쟁이 ‘정의로운 미국’의 허울을 벗기고, 사랑과 자유, 관습에의 저항을 부르짖던 히피즘이 창궐한 그 때 그 시절 영화평론가들은, 쇼핑몰을 어슬렁거리는 좀비들에게서 ‘생산물로부터 소외당한 노동자’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 노예처럼 살아가는 인간’ ‘몰개성적인 현대인의 초상’을 보았다. 뜻하지 않은 거대담론에 조지 로메로가 당황하거나말거나, 이때부터 좀비는 ‘그냥 좀비’일 수 없게 되었고, 마이너 공포물이었던 좀비영화도 점점 메이저화 되었다.5 


뛰어다니고 소통하고 전략을 짜고


그에 발맞춰 좀비/물도 ‘진화’했다. 규모는 당연히 커졌고, 좀비의 하드웨어도 좋아졌다. 비척대며 느릿느릿 걷던 좀비는 이제 날고, 뛰고, 구를 수 있다(<28일 후>). 괴상한 신음소리밖에 낼 수 없었던 과거와 달리 의사소통이 가능해졌고, 심지어 감정도 느낀다(<웜바디스>). 우르르 몰려다니기만 할 뿐 협동할 줄 몰랐던 선배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힘을 모으고(<월드워Z>) 전략을 짠다(<나는 전설이다>). 대자본의 수혜를 입은 좀비는 더 이상 ‘살아있는 시체(living dead)’가 아니라 “새로운 종의 가능성은 물론, 인간의 진화까지 의미하는 존재가 되었다.”6


장르의 내적 논리도 탄탄해졌다. 로메로의 시체가 맥락 없이 살아난 데 반해, 요즘은 대개 ‘바이러스 감염’을 원인으로 제시한다. 감염 경로는 여러 가지지만, 대기업이 돈 벌 요량으로 바이러스를 개발했다가 통제에 실패하면서 유포되는 경우가 많다(<레지던트 이블>). 이어 펼쳐지는 것은 ‘좀비 아포칼립스(zombie apocalypse, 좀비로 인한 세계종말)’다. 최근 좀비물들은 좀비들이 판치는 종말론적 세계, 그 속에서 살아남고자 악다구니 쓰는 인간 군상을 차갑게 묘사하고 비판하는 데 집중하는 추세다(<부산행> <워킹 데드>). 


인간사 거의 모든 것을 은유하는 존재


상황이 이쯤 되자 좀비/물은 인간사 ‘거의 모든 것’을 은유할 수 있게 되었다. 혹자는 인간의 외양을 띠고 있으나 인간성을 잃어버린 채 인간을 사냥하는 좀비를 ‘키보드 워리어(keyboard worrier, 일명 악플러)’에 빗댔다(재미있게도 이들 중 우파 성향을 띤 몇몇은 좌파 성향의 유저들을 ‘좌좀(좌익좀비)’이라고, 좌파 성향들은 반대파를 ‘우좀’이라고 부른다). 혹자는 현대인들이 무방비로 접하는 인터넷과 미디어를 좀비로 해석했다. 감염과 무한히 증식하는 속성에서 인류의 존속을 위협하는 ‘전염병’을 보는가 하면,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불가항력적 사태라는 점에 주목해 지진, 쓰나미, 핵발전소 폭발 등 현대적 ‘재난’의 메타포로 삼기도 한다. 


좀 더 나아가면 ‘인간의 탐욕에 대한 역설적 경고’가 되고, 어쩌면 ‘동족을 향한 증오와 폭력성을 죄책감 없이 발현하고픈 인간의 불온한 욕망’을 말할 수도 있다. 9·11 이후 사회에 만연한 불안과 공포의 할리우드식 반응, 인간 존재에 대한 회의 등 좀비/물에 대한 독해법은 무궁무진하며, 할 수 있는 이야기도 많다. 


오늘날 좀비는 존재로서 스펙터클이고, 알레고리고, 재미다. 


참고


1 라에네크 위르봉 저, 서용순 역, 『부두교: 왜곡된 아프리카의 정신』, 시공사, 1997.

2 아이티 혁명은 백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아이티의 독립은 근대 서구 자본주의를 가능케 했던 라틴아메리카 원주민의 절멸, 아프리카 노예무역, 사탕수수와 커피 플랜테이션, 즉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대한 완벽한 부정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스페인, 영국, 프랑스가 아이티의 독립을 필사적으로 막으려 한 이유이자, 독립국 아이티의 경제를 완전히 파멸시킨 이유다. 로런트 듀보이스 저, 박윤덕 역, 『아이티 혁명사』, 삼천리, 2014.

3 1251년 7월 16일 성모 마리아가 카르멜 수도원장 성 시몬 스톡에게 발현해 은총의 표지로 ‘갈색 스카풀라(scapular, 가톨릭 성의聖衣)’를 건네주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이후 7월 16일은 ‘카르멜 산 성모’ 기념축일이 되었다. 

4 영화 속에서 정부는 인공위성에서 발사된 전파를 원인으로 지목하는데,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라는 느낌이다.

5 견인차 역할을 한 영화가 2002년 대니 보일 감독의 <28일 후>다. 

6 김봉석·임지희, 『좀비사전』, 프로파간다,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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