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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사주 Mar 09. 2017

중국 공산당은 보이지 않지만 어디에나 존재한다

#전인대_지금, 여기 와 있지만 제대로 논의되지 못한 이슈들

중국 최대 정치행사인 양회가 지난 주 막을 내렸습니다. 중앙 정부가 개최하는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와 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를 통칭하는 양회는 중국 최대의 정치 행사입니다. 정치, 경제 등 중국의 나아갈 방향을 대내외에 천명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중국 양회에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리는 이유입니다. <뉴스의 배경>은 중국 최대 정치 행사인 양회와 양회를 움직이는 힘인 중국 공산당을 조명했습니다.  



전국인민대표회의全國人民代表大會 법률상 중국의 최고 권력기관


전국인민대표회의, 약칭 ‘전인대’는 중국 전역의 인민 대표들이 1년에 한 번씩 모여 국가의 중요 정책을 결정하는 정치행사다. 단순한 회의가 아니라 그해 중국에서 시행될 모든 정책과 방향을 결정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법률상 중국 최고의 권력기관으로 통한다. 해서 바로 앞에 열리는 중국 최고의 정책자문 회의,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약칭 ‘정협’)과 함께 ‘양회兩會’라고 불린다.  


여기서 잠깐 양회에 대해 알아보자. 사실상 중국은 공산당 일당독재로 운영되지만, 겉으로는 여러 정당과 정치세력이 공존하는 ‘다당협력제’를 표방하고 있다. 이에 공산당은 정책을 결정하기 전에 다른 정당들의 이해를 수렴하고 조율하는 ‘제스처’를 취함으로써 독재를 미화하는데, 정협이 바로 그 중추다. 

법률상 정협은 중국의 여러 정치세력과 계층들 간의 협상을 진행하는 자리다. 공산당을 제외한 모든 민주당파 대표들, 영화배우 공리와 주성치, 탁구선수 덩야핑 등 각 분야의 상징적인 인물들, 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소수민족 대표들이 참여해 ‘형식적으로’ 의견을 나눈다. 정협은 1949년 9월 처음 개최된 이래 매해 3월 소집돼, 10여 일간 (필요하면 20여 일도) 열린다. 


전인대도 비슷하다. 사실상 중국은 공산당 일당독재로 운영되지만, 겉으로는 인민이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간접민주주의’ 형태를 표방하고 있다. 이에 공산당은 정책을 발표하기에 앞서 다양한 인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제스처를 취함으로써 독재를 가리는데, 전인대가 그 중추다. 

인민 대표 선발과정은 이렇다. 먼저 일반 시민들이 투표로 구區의 대표를 뽑는다. 구 대표는 당연히 공산당원이다. 뽑힌 구 대표들 중에서 시市나 성省의 대표를 선발하고, 다시 여러 단계를 밟아가며 인민 대표를 추린다. 이렇게 선출된 2016년 인민 대표는 총 2,943명이다(임기 5년). 지역·성별·인종 면에서 다양하게 구성된듯하지만, 공산당원이 72퍼센트를 점유하고 있다. 


인민 대표가 꾸려지면 국무원의 주관 아래 전인대가 소집된다. 1954년 9월 처음 개최된 이래, 정협보다 하루 이틀 늦게 열려, 하루 이틀 늦게 끝나는 게 보통이다. 중국 최대의 정치축제지만, 행사를 전후로 공안이 시민들은 물론이고 인터넷과 언론, 반정부 요인들을 꼼꼼하게 감시하고 통제하기 때문에 분위기는 매우 조용하다. 그 고요 속에서 전인대는 헌법개정, 법률제정, 국가 주석과 부주석 선출, 국무원 총리와 구성원 임명, 중앙군사위원회 주석과 최고인민법원장, 최고인민검찰원장 선출, 경제·사회발전 계획 및 국가 예·결산 심사 등의 일을 처리한다. 열흘 남짓한 시간, 수천 명이 모여 결정하기에는 너무 큰일들이다. 그래서 전인대는 아래에 상설기관으로 상무위원회를 두고 정책과 방향을 미리 정해 둔다. 전인대의 역할은 상무위원회가 선정한 내용들을 비준하는 것이다. 외신들이 전인대를 두고 ‘지상 최대의 거수기’라고 부르는 이유다.  


당이 결정하면 전인대는 거수하고, 정협은 박수친다


상무위원회는 전인대 대표들 중 150명 정도로 구성된다.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비롯해 위원들의 임기는 5년이고, 연임이 가능하며, 중국의 모든 기관을 감독하는 권한을 갖는다. 즉 전인대의 진짜 권력은 상무위원회에 있다. 그런데 상무위원회는 공산당원만이 참여할 수 있고, 상무위원장의 공산당 내 권력서열은 주석(국가원수), 총서기(당 대표)에 이어 세 번째(지만, 대개 총서기가 주석을 겸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두 번째)다. 다시 말해 전인대의 실세는 공산당이다. 양협은 꼭두각시로서, “당이 결정하면 전인대는 거수하고, 정협은 박수친다.” 1년에 딱 한 번, 열흘 동안 공개되는 전인대에 전 세계 이목이 쏠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인대는 철저히 막후에서 움직이는 중국 공산당의 내부(권력투쟁)과 국정운영 방향을 짐작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2016년 전인대에서는 친환경·중고속 성장, 공급 사이드 및 국유기업 개혁, 탈빈 프로젝트 가동, 제13차 경제개발 5개년 규획 발동 등을 의결했다. 이로써 중국은 고속성장 시대가 끝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양보다는 질적 성장에 집중하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수출과 내수에서 문제로 지적돼온 과잉공급을 해소할 개혁안 등 향후 경제정책의 청사진도 제시했다. 또한 2020년까지 7,000만 명을 빈곤층에서 탈출시키고, 농촌을 떠나 온 도시노동자(농민공)의 복리후생을 강화하고, 공기 질을 개선할 계획을 구체적으로 밝힘으로써 ‘민생을 생각하는 공산당’의 이미지를 제고했다. 

 


중국 공산당中國共産黨 사실상 중국의 최고 권력기관 

 

1921년 7월 23일 상하이에서 마오쩌둥, 리다자오, 천두슈 등 열세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계기로 공식 창당했다. 초기에는 천두슈를 중심으로 도시 노동자를 지지층으로 삼았는데, 쑨원의 국민당에 비해 세력이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국민당과 연합해 항일전을 벌이던 와중 쑨원이 사망하고, 이후 국민당을 장악한 장제스가 ‘반공 쿠데타’를 전개하면서는 거의 괴멸 직전까지 내몰렸다. 그러나 국민당에 쫓겨 전국을 떠돈 ‘대장정’이 결과적으로 공산당에게 전화위복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마오쩌둥의 당내 지도권이 확립되고, 홍군紅軍의 결속력은 단단해졌으며, 인민들, 특히 농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새로워진 공산당은 1935년 두 번째 국공합작으로 일본군을 몰아낸 다음, 1946년 국민당을 상대로 내전을 전개했다. 그리고 3년간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천신만고 끝에 정부를 수립했으나, 내홍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중국 공산당의 역사는 당내 권력투쟁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는데, 정권 수립 직후에는 ‘개국공신’ 장궈다오, 가오강, 왕밍, 펑더화이 등이 마오쩌둥과 힘겨루기를 벌였다. 1967년에는 마오쩌둥이 같은 이유로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다. 1950년대 추진한 경제정책인 ‘대약진운동’이 실패하면서 실용·수정주의 노선의 류샤오치, 펑더화이, 덩샤오핑 등에 실권을 빼앗긴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을 빌미로 주석이던 류샤오치를 몰아내고 당권을 탈취했다. 손수 후계자로 지목했던 린뱌오를 숙청했다. 류사오치와 펑더화이도 정치적으로 살해했다. 덩샤오핑은 10년 간 트랙터 공장에서 일하는 등 주변을 떠돌았다. 십수 년간 중국/공산당을 혼돈에 빠트린 문화대혁명은 1983년, 마오를 뒤이어 권력투쟁을 벌인 ‘4인방’에 무기징역 등을 확정하고서야 끝났다. 


한편, 마오쩌둥은 1976년 사망했다. 한지에 있던 덩샤오핑이 정계에 복귀했다. 일찍이 경제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덩샤오핑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철학으로 공산주의에 시장주의를 결합하여 파탄 난 중국 경제를 구제했다. 그러나 경제에 불어넣은 ‘자유화’ 바람은 정치와 사회에도 영향을 미쳐서, 1989년 ‘텐안먼 사건’을 촉발시켰다. 덩샤오핑은 인민의 민주화 요구를 폭력으로 진압한 후, 그에 대한 책임으로 장쩌민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권력투쟁의 역사이자 통제력을 가다듬어온 역사


중요한 것은, 이토록 끊임없이 정치적 격랑을 겪는 가운데서도 공산당이 중국에 대한 장악력만은 잃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법률상 중국의 권력은 행정부와 사법부, 인민해방군에 분산돼 있지만, 실상 공산당은 모든 것을 독점할뿐더러 모든 것에 우선한다. 다시 말해 당은 사법부가 내린 판결을 번복하라고 지시할 수 있다. 비리를 저지른 정부 고위인사는 검찰에 앞서 당의 조사부터 받는다. 2007년 최고인민법원이 전인대에 제출한 보고서를 보면, 판사들이 충성해야 할 대상은 당, 정, 인민, 법 순이기 때문이다. 

군은 당 내 중앙군사위원회의 통제 아래 있고, 인터넷을 포함한 언론 전체가 공산당의 검열을 받는다. 돈을 버는 일도 공산당을 통해야만 가능하다. 중국 공산당의 역사는 권력투쟁의 역사이자, 은밀하지만 확실하게 인민에 대한 통제력을 가다듬어온 역사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당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능동적으로 변화했다. 정치적으로는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했다. 과거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은 독단적으로 후계자를 정했는데, 그 결과 권력승계와 정치노선을 둘러싸고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당은 중앙정치국을 구성하고, 상무위원 아홉 명에게 권력을 분산했다. 이들이 오늘날 중국을 움직이는 진짜 실력자로, 상무위원의 서열이 곧 중국의 권력서열이 된다. 


상무위원은 아래서부터 차근차근 실무 경험을 쌓고 올라온 공산당 엘리트들이며, 상하이방, 공청단, 태자당 등 당내 3대 정파들의 합종연횡으로 추대된다. 이로써 공산당은 죽고 죽이는 ‘야만의 시대’에서 ‘경쟁과 협력의 시대’로 이행할 수 있었다. 또한 장쩌민의 후임인 후진타오 시대부터는, 기한이 없던 지도부의 임기를 10년으로 제한하고(5년 연임), 후임자가 전임자의 노선을 최대한 유지하는 관행으로 정치의 예측 가능성을 높였다. 종신직에 가까웠던 원로들의 임기도 67세로 정해, 당의 쇄신에 힘썼다. 


보이지 않지만 어디에나 존재한다


경제와 사회문화도 마찬가지다. 덩샤오핑의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 이래 당이 대표하는 계급은 농민, 노동자에서 기업인, 자본가, 지식인이 되었다. 국내외 신흥 기업가와 자본가들이 돈을 벌기 위해 당에 가입했고, 당은 이들의 이익을 보호했다. 그 반대급부로 사회적 불평등과 빈부격차가 심해지자, 후진타오는 사회통합을 위해 일찍이 마오가 폐기했던 유교사상을 끌어왔다. 점증하는 민주화 요청도 수용했다. 중국 인민들은 ‘당이 허락하는 한’ 자유를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해결되지 않은 빈곤과 환경파괴, 부정부패 문제에 대하여 시진핑은, 강력한 반부패 사정작업과 2016년 전인대로 응답했다. 


당은 변화무쌍하고 전지전능하며, 시의적절하고 무소불위하다. 신이 그러하듯 공산당은 “보이지 않지만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리고 유사 이래 중앙집권체제에 익숙한 중국 인민들은, 공산당의 그물망 같은 영도력을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이것이 1991년 공산주의 ‘본진’이 무너지고도 20년 이상을 존속한 중국 공산당의 힘이다. 안팎으로 위기가 닥칠 때마다 “이제 중국은 곧 내파 할 것”이라고 떠들어대는 서구의 예상이 번번이 빗나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태자당, 상하이방, 중국공산주의청년단 중국 공산당 내 세 파벌


사적 관계를 공적 영역으로까지 확대하는 중국 ‘꽌시 문화’의 전형으로, 파벌이라기보다는 인맥에 가깝다. 그러다보니 어느 계파라고 딱 잘라 말하기 어렵게 여기저기 양다리 걸친 인사도 많다. 중국공산주의청년단(이하 공청단) 출신인데 상하이에서 오래 일하면서 인맥을 쌓은 덕분에 상하이방으로 분류된다든지 하는 식이다. 물론 3대 정파에 대한 공산당의 공식 입장은 “당내 파벌 없음”이다. 


이름이 말해주듯 태자당은 대장정, 항일전쟁, 국공내전을 함께한 공산당 ‘성골’들의 후계자 집단이다. 덩샤오핑의 자녀와 사위, 저우라이언의 양자 등 이름 짜한 부모를 둔 사람이 대부분이고, 그 후광으로 중국 정재계 요직을 두루 차지하고 있다. 2016년 현재 중국의 주석이자 공산당 총서기 시진핑도 태자당 출신이다. 


상하이방은 1989년 ‘텐안먼 사건’을 기점으로 형성되었다. 당시 상하이 시 당 서기였던 장쩌민은, 텐안먼에 군대를 파견하겠다는 결정을 지지하면서 덩샤오핑의 눈에 들었다. 일개 시의 서기에 불과했던 장쩌민은 곧장 당 총서기 겸 중앙군사위 주석으로 취임했고, 이후 급진파들과의 권력투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당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상하이 경제관료 출신인 장쩌민은 당내 지지기반이 거의 없었다. 이에 상하이 지역의 능력 있는 엘리트들을 대거 중앙에 발탁하며 상하이방을 조직했다. 


상하이방 세력은 덩샤오핑이 상하이, 선전, 주하이 등 남반구 경제특구를 순시하며 개혁개방 기조를 더욱 강화할 것을 약속한 ‘남순강화’를 계기로 확장일로를 걸었다. 장쩌민은 자신의 지역기반인 상하이를 중심으로 막대한 투자를 감행했고, 엄청난 경제발전을 견인했으며, 그 실적을 바탕으로 상하이 인맥을 계속해서 중앙정부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2000년대 초까지 전성기를 구가했던 상바이방은 장쩌민이 국가 주석 자리를 내놓으면서 순식간에 몰락했다. 장쩌민 한 사람에게만 의존한 권력구조가 원인이었다. 얼마나 빨리 쇠락했던지, 장쩌민은 후진타오에게 당권을 넘겨주고 나서도 정치적 보복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낼 때까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를 유지해야 했다. 장쩌민이 완전히 퇴진한 후 상하이방은 당내 최대 계파인 공청단을 견제하기 위해 태자당과 손잡았다. 


공청단의 특징은 (여러 모로) 젊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문화대혁명을 겪고, 경제민주화 열풍을 몸소 체험했으며, 해외 유학 등으로 견문을 넓힌 이들은, 대개가 공학도 출신으로 세련된 매너와 실무능력을 두루 갖춘 인재였다. 이러한 장점을 살려 주로 외교와 정보통신 분야에서 활동하다가, 2004년 공청단 수장이던 후진타오가 국가 주석이 되면서 위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세 정파의 협력과 견제가 곧 권력투쟁


오늘날 중국 공산당의 권력투쟁은 이들 세 개 정파의 협력과 견제로 요약된다.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차기 지도자로 누구를 추대할 것인가, 이를 위해 누구를 찍어낼 것인가 등등 중요한 정치적 결정들이 대개 이런 프로세스를 통해 도출된다. 2012년 ‘보시라이 사건’을 한번 보자. 


태자당 핵심 인사 보시라이는 중국 정부의 개혁개방 노선에 반하는 보수파로서, 언론 노출을 즐기는 매우 호전적인 인물이었다. 이러한 성향이 비밀주의를 선호하는 공산당의 전통 및 후진타오의 정책 방향과 충돌한 까닭에, 2007년 보시라이는 정치국 상무위원회 9인에서 낙마하고 충칭 시 당 서기로 좌천되었다. 


와신상담하던 보시라이는 충칭 시 공무원의 부패와 범죄조직을 일소하는 ‘범죄와의 전쟁’을 통해 대중적 인기와 지지를 얻은 것은 물론, 차세대 지도자 유력 후보로 급부상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보시라이가 충칭 시 전 사법국장이자, 공청단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원창을 사형시켰다는 것이다. 나아가 충칭 시 공청단들을 한직으로 몰아내고, 중앙정부의 친 시장 드라이브와 정반대 경제정책을 지속하며 후진타오를 압박했다. 


양측의 긴장은 뜻밖의 일로 해소되었다. 오랫동안 보시라이 부부는 영국 기업가 닐 헤이우드를 이용해 엄청난 자금을 해외로 빼돌리고 있었다. 그런데 헤이우드가 수수료를 올려달라고 요구하면서, 말대로 하지 않으면 그간의 비리를 전부 폭로하겠다고 협박했다. 이에 보시라이의 아내가 2011년 11월 헤이우드를 살해하고 사인을 급성알코올중독으로 위조했으나, 영국 정부가 타살 의혹을 제기하며 재조사가 불가피해졌다. 


결국 보시라이의 최측근이자 충칭 시 공안국장 왕리쥔이 재조사에 투입되었다. 진상을 알게 된 왕리쥔은 보시라이와 대립하다 경질되고, 신변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2012년 2월, 미국 대사관에 망명을 요청했다. 그러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왕리쥔은 베이징 중앙정부로 끌려갔다. 후진타오는 이 사건을 보시라이를 숙청하는 데 이용했다. 


보시라이의 비리는 만천하에 폭로되었다. 비호세력이던 태자당과 상하이방도 결국 등을 돌렸다. 전인대 상무위원회는 보시라이의 전인대 대표 자격을 박탈하며 정치적 사망선고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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