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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사주 Mar 23. 2017

중동 분쟁은 해결하려 할수록 꼬인다

#IS와 테러_지금, 여기 있지만 제대로 논의되지 못한 이슈들

영국 런던에서 또 다시 테러가 발생했습니다. 2005년 52명이 숨진 지하철 자살 폭탄 테러 이후 최악의 테러입니다. 용의자는 이슬람 설교자로 알려졌고, 언론은 그를 '외로운 늑대'라고 말합니다. 과거 체첸 반군이 스스로를 일컫었던 이 말은 이제 자생적 이슬람 테러리스를 지칭하는 대표적인 용어가 됐습니다. 그들은 IS 사상에 도취돼 자신들이 태어나 살고 있는 바로 그 곳에서 테러를 저지릅니다. 세계 최고의 정보력을 자랑하는 미국과 유럽이 미리 막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무엇 때문에 테러라는 극단적 수단을 택한 것일까요? 이 테러는 왜 근절되지 않는 것일까요? <뉴스의 배경>은 끊이지 않는 극단적 이슬람계의 테러의 배경에 주목했습니다. 시작은 이슬람 양대 종파 '시아'와 '수니'입니다.   



수니Sunni, 시아Shia 이슬람교 양대 종파


서기 632년 이슬람교 창시자 마호메트 무함마드가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숨졌다. 이에 원로들이 무함마드의 절친이자 장인 아부 바크르를 차기 칼리프caliph로 추대했다. 칼리프의 계보는 2대 우마르, 3대 우스만, 4대 알리까지 약 30년 간 이어졌다. 그런데 4대 칼리프 알리가, 당시 한창 세력을 키우던 우마이야 가문과 패권을 놓고 다투다 재위 5년 만에 살해되었다. 알리를 제거한 우마이야 가문은 메디나(사우디아라비아)에서 다마스쿠스(시리아)로 근거지를 옮기고 ‘우마이야 시대’를 열었다. 


문제는 이때부터다. 우마이야 왕조는 자신이 알리를 뒤이은 5대 칼리프라고 주장했다. 알리의 추종자들은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로서 무함마드의 혈통을 이어받은 알리만이 (무함마드의) 유일한 후계자라고 맞섰다. 여기서 수니와 시아가 갈렸다. Ahl al-Sunnah, ‘전통의 사람들’에서 이름 딴 수니는, 칼리프도 한낱 인간이기에 얼마든지 집단합의로 추대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 Shia-t-Ali, 말 그대로 ‘알리를 따르는 사람’을 뜻하는 시아는 무함마드의 직계후손에게만 후계자 자격이 있다고 간주했다. 


우마이야 왕조는 당연히 알리 가문과 시아파를 탄압했다. 670년 알리의 아들 핫산이 독살되었다. 10년 후에는 또 다른 아들 후세인이 ‘카르발라 전투’에서 갈가리 찢겨 죽였다. 이것이 수니와 시아의 역사상 첫 무력충돌이자, 시아파 최대 종교일 ‘아슈라Ashura’의 기원이다. 이슬람력으로 매해 1월 열 번째 날 시아파들은, 채찍과 사슬로 고행하며 이라크 카르발라까지 순례하면서 알리와 후세인의 순교를 애도한다. 


한편 우마위야 왕조가 시아를 몰아내고 칼리프 지위를 세습하면서, 수니는 이슬람의 주류세력이 되었다. 오늘날 이슬람교도의 85퍼센트 이상이 수니이고, 맹주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해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터키, 이집트, 예멘, 아프가니스탄, 튀니지 등 어지간한 국가들은 모두 수니가 권력을 쥐고 있다. 반면 시아는 1501년 (이란의) 사파비 왕조가 국교로 삼기까지 내내 음지에 머물렀다. 현재 아랍에서 시아가 득세한 곳은 맹주 이란을 비롯해 이라크, 바레인, 아제르바이젠 정도다. 


영원불변의 경전 vs 진정한 지도자


해서 수니와 시아는, 비록 기본 믿음은 같을지언정 교리, 의식, 규칙 등에서 차이가 확연해졌다. 이를테면 수니에게 코란은 영원불변의 경전이며, 칼리프 시대 이후 교단을 이끄는 이맘Imam은 집회를 인도하고 설교하는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칼리프 시대를 인정하지 않는 시아에게 이맘은 무함마드를 잇는 ‘진정한’ 지도자이고, 코란 해석도 이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수니에게 알리는 4대 칼리프이지만, 시아에게는 1대 이맘이다. 


신자의 의무도 다르다. 수니는 유일신 고백, 예배, 헌금, 라마단 중 금식, 성지순례 등 다섯 가지. 시아는 여기에 선행과 지하드Jihad를 더했다. ‘성전聖戰’으로 풀이되는 지하드는 이교도들이 이슬람 영토와 신념을 위협할 때 맞서 싸울 것을 지시하는 의무조항이다. 순혈주의, 제정일치, 지하드, 순교 등 시아의 종교문화는 모두 수백 년 간 핍박 속에서 한지를 떠돌며 만든 소수자 역사의 부산물로써, 이 때문에 수니보다 보수적이고 과격한 인상을 주곤 한다. 


선연한 힘의 차이에도 시아는 수니와 그럭저럭 어울려 살았다. 박해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상대를 증오하는 각 종파의 극단주의자들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근현대 아랍이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 서구열강과 본토의 정권들이 이권을 놓고 이합집산하며 싸우는 전쟁터가 되고, 동시에 제국주의, 시오니즘, 냉전이데올로기, 민족주의, 자본주의, 이슬람주의, 민주주의가 중첩돼 충돌하면서, 수니와 시아의 분열은 때로는 그 자체로, 때로는 각 세력이 목적을 달성하는 데 가장 손쉽게 이용할만한 빌미가 되어 유혈사태를 불러왔다. 끝없는 예시목록 중에 이란-이라크의 ‘8년전쟁’을 한번 보자.  


사담 후세인과 호메이니의 등장

1979년 수니파 사담 후세인이 쿠데타로 이라크 대통령자리에 올랐다. 같은 해, 이란의 시아파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팔레비 왕조의 전제정치를 끝장내는 ‘이슬람혁명’을 성공시켰다. 반미정서(팔레비 왕조 뒤에는 미국이 있었다)와 민족주의가 강력한 동인이었다. 

이란과 국경을 맞댄 이라크의 후세인은 혁명의 여파가 자국에 미칠까봐 걱정했다. 정통 시아파 국가에서 한줌밖에 안 되는 수니파가 이제 막 정권을 잡아 안 그래도 불안한 판국에, 이란의 움직임이 국내 시아파들을 어떻게 동요시킬지 알 수 없었다. 실제로 호메이니는 혁명 수출 제1호 국가로 이라크를 공공연히 지목한 터였다. 


그리하여 1980년 9월 20일 후세인은 이란을 침공했다. 명분은 석유였지만, 누가 봐도 독재자의 공포가 빚은 종파 간 전쟁이었다. 그러자 이슬람혁명으로 이란과 반목하게 된 미국이 은밀히 이라크를 지원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등은 시아파의 확장을 견제하고자 대놓고 합세했다. 이란은 수니 연합과 미국의 파상공세를 8년이나 버티다가, 1988년 8월 20일 휴전협정을 맺었다. 


서구열강, 종파 갈등을 부추기고 확대하고 방관하다


사상자 100만 명을 낸 무의미한 전쟁 이후, 종파 싸움을 빙자한 권력투쟁과 이전투구는 본격화되었다. 독재자들은 정권을 유지하는 데, 여당은 야당을 탄압하는 데, 수구파는 혁신파를 제거하는 데 종파를 이용했다. 미국은 공산주의를 척결하기 위해, 소련은 공산주의를 확장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 등은 영향력을 지속하기 위해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독재자와 반독재세력을, 여당과 야당을, 수구파와 혁신파를 선택적으로 지원하며 종파 갈등을 부추기고 확대하고 방관했다. 이것이 오늘날 아랍의 모든 분쟁과 전쟁과 내전의 근원이자, 서구사회를 위협하는 난민문제와 테러리즘의 시발점이다. 


2016년 1월 사우디아라비아가 자국 내 시아파 47명을 집단 처형하고, 이에 항의하는 이란과 외교관계를 끊었다. 양국 간의 외교단절은 1991년 외교관계를 회복한지 25년 만이다. 전문가들은 국제유가가 하락하며 국내 정치경제가 흔들리자, 사우디 정부가 이를 종파 갈등으로 돌파하려 한다고 분석했다. 일각에서는 이란이 미국과 핵 협상을 타결하며 국제사회에 재등장한 일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내비친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1 



시리아 내전 시리아의 반독재 민주화시위에서 비화된 전쟁


1970년 시리아 국방장관이던 하페즈 알아사드가 쿠데타로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30년간 독재정치를 펼치다가, 죽기 전 아들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대통령직을 세습한 바사르 알아사드는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독재를 이어갔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0년 12월, 튀니지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취직이 안 돼 노점상을 하던 무함마드 부하지지가 경찰의 단속에 항의하며 분신자살한 사건이 도화선이 되었다. 부하지지의 죽음에 오랜 세월 가난과 불평등에 시달리던 튀니지 민중이 일어섰고, 그들의 분노는 곧 23년간 온갖 비리와 부정부패를 저지른 독재정권으로 향했다. 결국 2011년 1월 14일 독재자 벤 알리가 사우디아라비아로 도망쳤다. 세계는 이를 ‘재스민혁명’2이라고 불렀다. 


혁명의 열기는 곧 이웃한 독재국가들로 번졌다. 같은 해 2월, 이집트 시민들은 30년 장기 집권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을 몰아냈다. 10월 리비아는 격렬한 내전 끝에 무아마르 카다피 대통령을 사살하며 42년 독재정치를 끝냈다. 11월에는 예멘의 압둘라 살레 대통령이 권력이양을 약속하면서 33년간의 철권통치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것이 이른바 ‘아랍의 봄’이다. 

알아사드의 세습 독재에 신물이 난 시리아에서도 2011년 3월부터 반독재 시위가 연이었다. 정부는 벽에다 반정부 구호를 쓴 십대 소년 셋을 붙잡아다 고문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격분한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오자 실탄사격으로 응수했다. 이에 시민들이 무장으로 저항하면서 시리아는 내전에 돌입했다. 


민주화운동이 종파 전쟁으로 비화되다


헌데 공교롭게도 알아사드 정권은 시아파, 시민 대개는 수니파였다. 민주화운동은 삽시간에 아랍의 종파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먼저 이란과 레바논의 시아파 무장세력 ‘헤즈볼라’가 알아사드 편에 붙였다. 그러자 아랍 전역에서 과격 수니파들이 시리아로 몰려들어 반정부군 편에 섰다. 튀니지에서는 급진 ‘무슬림형제단’이 넘어왔다. 이라크에서는 사담 후세인과 함께 실권한 군경들이 합류했다. 일찍이 미국이 과격 이슬람 테러단체로 분류한 ‘알카에다’의 분파도 끼어들었다. 터키는 직접 참전하진 않았지만 시리아로 향하는 무장 세력에 길을 내주었다. 2011년 7월 시리아 정부가 수감 중이던 지하디스트들을 대거 석방하면서 수니파 과격분자의 수는 더욱 늘어났다. 정부는 풀려난 지하디스트들이 반군과 접촉하기를 기다렸다가, 이를 핑계로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여기에 이슬람에서의 지분을 주장하는 서구열강까지 참가했다. 러시아는 하페즈 시절부터 관계가 돈독했던 알아사드 정권을 편들었다. 미국은 반군 쪽에 섰지만, 이제 막 이라크에서 군대를 물리기 시작한 터라 적극적으로 개입할 여력이 없어 관망세를 취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전쟁은 시작하자마자 난투극 양상을 띠었다. 정부군은 반군과 싸웠다. 반군은 종파와 지역에 따라 수십 개로 쪼개져 서로 싸웠다. 2013년 IS가 등장하고서는 미국, 영국, 프랑스 등 국제연합군이 시리아로 진격해 IS와 싸웠다. 사이사이 러시아군이 반군과 싸웠다. 끝없는 살육전 속에서 시리아인들의 삶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2015년 현재 시리아 내전으로 약 25만 명이 숨졌다. 1,100만 명이 난민이 되었고(560만 명이 어린이), 그중 약 500만 명이 살인, 방화, 고문, 납치, 약탈, 강도, 강간, 폭격, 생화학무기 살포를 피해 다른 나라, 주로 가까운 서유럽으로 흘러들어갔다.

 


IS(Islam State) 이슬람 최대, 최악의 테러집단


2001년 9·11테러 이후, 미국 조지 부시 대통령은 북한, 이란,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2003년 3월 20일, 사담 후세인이 대량살상 무기를 만들고 테러를 지원한다면서 이라크를 침공했다. 개전 26일 만에 이라크 주요 지역을 모두 점령하면서 전면전은 사실상 끝났지만, 대량살상 무기와 테러를 지원한다는 증거는 끝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국제사회는 미국이 이라크의 원유를 확보하고, 침체에 빠진 자국 경기를 부양하고, 아랍에 친미 블록을 구축하는 데 전쟁을 이용했다고 비난했다.  

한편 후세인을 축출한 이라크는 미국의 관리감독 아래 자유선거를 치렀다. 총선은 시아파의 압승으로 끝났고, 총리로 발탁된 누리 알말리키는 정권을 잡자마자 수니파 척결에 나섰다. 이로써 아랍의 과격 수니파들이 떨쳐 일어나 이라크로 모일 모든 조건이 갖춰졌다. 


2011년 말 미국이 이라크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시아파에 핍박당하던 수니파 세력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 반격에 나섰다. 이 중에는 알카에다 이라크 지부 ISI(Islam State of Iraq, 이슬람이라크국가)도 있었다. 아부 바르크 알바그다디가 이끄는 ISI는 후세인 치하에 있던 군사 및 정보장교들을 집중 영입하는 동시에, “내전이 발발한 시리아에 알카에다 지부를 만들라”는 본부의 지령을 받들어 시리아 동북부에 ‘누스라 전선’을 형성했다. 이후 누스라 전선은 시리아 내 과격 수니파들의 집결지가 되었다. 


영국보다 큰 영토, 석유 밀매로 얻은 자금, 최첨단 미군 장비

이라크와 시리아의 알카에다 분파는 빠르게 성장했다. 특히 ISI는 이라크 교도소에서 지하디스트들을 탈옥시키는 ‘담장파괴’로 이름을 떨치며 급속도로 세를 키운 다음, 2013년 4월 13일 누스라 전선과 통합해 ISIL(Islamic State of Iraq and the Levant, 이라크레반트이슬람국가)3를 세우겠다고 발표했다. 

알카에다 본부는 물론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알바그다디는 이라크와 시리아 국경은 제국주의 세력이 그어놓은 것이며, 이를 인정하는 것은 제국주의를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이 말에 심금이 울린 수많은 지하디스트들이 누스라를 떠나 ISIL로 옮겨왔다.4 


그에 힘입어 2013년 5월 ISIL은, 누스라의 본거지이자 시리아 반군이 점령한 유일한 도시 락카를 무력으로 탈취해 수도로 삼았다. 이어 알카에다에서 떨어져 나와 독자노선을 걷겠다고 선언한 후, 이라크로 군사적 공세를 확대했다. 

6월 10일 이라크 제2도시 모술이 ISIL 손에 떨어졌다. 며칠 뒤 수도 바그다드가 무너졌다. 파죽지세로 후세인의 고향 티크리트에 진격한 ISIL은, 2014년 6월 29일 마침내 IS 건국을 선포했다. “영국보다 더 큰 영토, 모술 중앙은행에서 확보한 5억 달러 현금, 최소한 매달 1,200만 달러의 세금과 석유 밀매로 얻는 엄청난 수입, 이라크 정부군이 버리고 간 탱크와 헬기, 장갑차 등 첨단 미군 장비, 자신의 영토로 밀려드는 전사들”5을 갖춘 최초의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이 탄생한 것이다. 

 

IS는 점령지에 이슬람 율법 샤리아를 적용했다. 신의 뜻을 삶의 모든 분야에 적용한다는 명목 아래, 수니파 이외는 모두 죽거나 고문당하거나 투옥되었다. 여성과 이교도들은 노예로 팔려갔다. 유적은 파괴되고, 유물은 밀수업자들에게로 넘어갔다. 살인, 강간, 납치, 테러 등 폭력행위는 전부 ‘지하드’로 포장되었다. IS는 이것이 이슬람에 칼리프 국가를 세우기 위한, 나아가 전 세계를 칼리프 국가로 통일하기 위한 ‘종교전쟁’이라고 주장했다. 


그럴싸한 이상과 힙하고 쿨한 태도


그러자 아랍의 무장세력들이 IS 아래로 헤쳐모였다. ‘국경 없는 칼리프 국가’는 그럴싸한 이상이었다. 서구의 눈치 따윈 보지 않는 태도도 쿨했다. 알카에다 분파들이 너도나도 알바그다디에게 존경을 표하며 IS 산하로 들어갔고, 신규 테러집단들도 충성을 맹세했다. 졸지에 ‘쩌리’가 된 알카에다가 ‘미국이 우리를 없애기 위해 IS를 지원한다’는 음모론을 제기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6  

더욱이 IS는 힙하기까지 했다. 날마다 전투와 테러 장면을 감각적으로 편집한 다음, 여러 트위터 계정을 통해 널리 퍼트렸다. 덕분에 매달 수십 수백 명의 서구 젊은이들이 칼리프 국가가 건설되는 ‘역사적 순간’에 함께하기 위해 IS를 찾았다. 


이쯤 되자 그간 남의 나라 일이라고 수수방관하던 서구와 수니파 국가들이 부랴부랴 IS 진압에 나섰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2015년 12월 프랑스 파리를 시작으로 벨기에 브뤼셀, 독일 뮌헨, 프랑스 니스 등 유럽 ‘본토’에서의 테러가 연이었다. IS는 난민으로 인해 정치적·사회적·재정적 어려움에 처한 유럽의 사정을 역이용해 전세를 유리하게 끌어갔다.  


지금껏 유럽의 난민정책은 ‘관용’이었다. 그러나 시리아 내전으로 난민 수백만 명이 한꺼번에 밀려들자 기조에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반난민 정서가 팽배하고 차별과 증오가 노골화되었다. 난민을 편입시키는 데 드는 비용 문제는 2016년 6월 23일 ‘브렉시트Brexit’7를 야기했고, 유럽은 결국 분열되었다. 

달라진 사회분위기는 유럽 내 이민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중 몇몇은 IS의 테러리즘에 동조했다. 2016년 7월 14일, 84명의 목숨을 앗아간 ‘니스 테러’의 범인은 튀니지계 프랑스인이었다. 


딜레마에 빠진 서구열강


딜레마는, 지금 상황에서 유럽이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만약 테러리스트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난민을 받지 않으면, ‘관용’ 정신이 훼손될뿐더러 IS가 그들을 데려가 ‘전사’로 키울 여지가 있다. 그렇다고 받으면, 재정적 부담은 물론 사회적 갈등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만악의 근원인 시리아 내전에 포커스를 맞춘대도 사정은 같다. 휴전협정을 맺으려면 이해당사자들끼리 뜻을 모아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이게 매우 요원하다. 서구열강과 주변국들은 알아사드 정부를 협상 테이블에 앉히고 싶어 한다. 비록 독재자일망정 갑작스럽게 권력공백이 생길 경우, 이라크처럼 극심한 사회 혼란이 야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원하는 것은 알아사드의 ‘자발적’ 권력이양이다. 하지만 시리아 반정부 인사들은 서구의 생각에 분명한 반대 입장을 표하고 있고, 사정은 알아사드도 마찬가지다. 그는 아직도 내전에서 자신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수십 개 반군들을 협상에 끌어들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설령 모아 앉힌다 해도 다들 수니파 극단 무장단체 출신이라 평화를 장담할 수도 없다.8 그럼에도 미국과 러시아는 2016년 9월 9일 잠정 휴전에 합의하고, 유엔의 중재 아래 알아사드 정권과 반군이 평화협정을 맺도록 중재에 나섰다. 하지만 일주일 후 러시아가 합의를 무시하고 시리아 알레포 지역 민간인들을 무차별 폭격하면서, 상황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 사이 아랍의 일상은 점차 서구의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2016년 7월 21일, IS에 충성을 맹세한 알제리계 프랑스 청년 두 명이 루앙 시 성당에 난입해 미사를 집전하던 신부를 살해했다.


참고


1 김주형, ‘중동 두 맹주 충돌… 종파 전쟁 요동치는 이슬람’, 한국일보, 2016.1.4.

2  재스민은 튀니지에서 가장 흔한 꽃이다.

3 레반트는 시리아를 중심으로 레바논, 요르단, 팔레스타인 등 지중해 동부 연안의 중동 지역을 아우르는 지명이다.

4 정의길, 『이슬람 전사의 탄생』, 한겨레출판, 2015.

5 정의길, 앞의 책.

6 사무엘 로랑 저, 은정 펠스너 역, 『IS리포트』, 한울, 2015.

7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뜻하는 신조어로 ‘영국Britain’과 ‘탈퇴exit’를 합성했다.

8 아크란 벨카이드, 「IS 격퇴가 어려운 이유」, 『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15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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