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순정만화 작가 사전] - 황미나
여성/만화/작가 중심의 ‘한국만화사 다시 쓰기’ 프로젝트, [한국 순정만화작가사전]이 소개하는 첫 번째 작가는 황미나입니다. 1960년대 엄희자, 민애니 등이 왕성히 활동하며 한국 만화의 전성기를 견인하지만 호황도 잠시, 박정희 군사정권이 모든 출판물을 사전검열하면서 창작자들의 상상력과 산업은 크게 위축됩니다. 그중에서도 ‘순정’만화는 퇴폐와 사치풍조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더욱 혹독한 검열을 받았습니다. 와중에 ‘고퀄’의 일본 소녀만화가 대거 ‘해적판’으로 유입되고, 돈벌이에 급급한 출판사가 무분별한 베끼기에 나서면서 한국 만화는 독자에게 점점 외면을 받아, 1980년대 즈음엔 거의 명맥이 끊길 지경에 이릅니다. 황미나는 이 척박한 토양에서 홀로 자기만의 길을 낸 작가이자, 단절될 위기의 여성/만화/가의 계보를 잇고, 이후 도래할 한국만화/잡지의 르네상스를 이끈 선구자입니다.
데뷔작 | 1980년 《이오니아의 푸른 별》
대표작 | 《레드문》 《굿바이 미스터 블랙》 《우리는 길 잃은 작은 새를 보았다》 《엘 세뇨르》 《파라다이스》 《윤희》 《저스트 프렌드》
이견 없는 한국 만화계의 거목. 1980년 『소녀시대』 창간호에 《이오니아의 푸른 별》을 연재하며 데뷔한 이래, 국경과 장르, 매체를 넘나들며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았던 모험가이자 근면성실의 대명사다. 엄희자, 민애니 이후 여성/만화의 계보가 끊기다시피 한 상황에서 홀로 제 길을 낸 개척자였으며, 검열의 희생자로서 1997년 청소년보호법 제정을 저지하는 데 앞장선 투사였다. 종이에서 웹으로 매체가 바뀔 때 변화에 가장 먼저 대처한 얼리어답터였고, 후발주자들을 위해 자신의 노하우를 집대성해 《황미나의 포토샵 만화 감잡기》를 펴낸 친절한 선배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그림, 역동적인 연출, 탄탄한 서사, 코미디면 코미디 SF면 SF 무협이면 무협 다 되는 팔색조 스타일에 좋은 대사를 쓰는 능력까지 가졌으나, 불행히도 의복 센스만큼은 갖추지 못했다.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난 황미나는, 넉넉지 않은 가정의 소녀가장이었던 탓에 만화가로 진로를 확정할 때부터 직업작가를 염두에 두었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워낙 지루한 것을 못 참는 성격이라 일찍이 쿵푸를 비롯해 이것저것 잡다하게 발을 걸쳤다는데, 그래서인지 작품도 이리저리 장을 넘나들며 다양하게 했다.
초기에는 일본 소녀만화(인줄 모르고 봤던 무수한 만화들의 서사와 스타일)의 영향을 받아 《불새의 늪》 《아뉴스데이》 《유랑의 별》 등 서구를 배경으로 한 신파조 시대물이 많았다. 하지만 곧 자신이 그림, 연출, 세계관 등에서 일본을 모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구를 에두르지 않은 지금, 여기를 '자기만의 스타일로' 이야기하고 싶다는 열망을 품었다. 그렇게 발표한 작품이 1985년 《우리는 길 잃은 작은 새를 보았다》이다.
이야기는 앵벌이 조직에서 남매처럼 자란 ‘신애’와 ‘진섭’이 마음씨 좋은 중소기업 사장 내외에게 입양되면서 시작된다. 전개 과정에서 기업의 부도, 이혼, 판자촌 같은 설정도 슬쩍 끼어들어갔다. 이에 대해 검열기관은 ‘출판 부적격 판정’을 내렸는데, 주인공들이 왜 이렇게 돈을 못 버느냐, 부부가 왜 이혼을 하느냐, 왜 판자촌이 나오느냐, 등장인물의 걸음걸이가 왜 이렇게 허무하냐 등등의 시답지 않은 이유 때문이었다. 《우리는 길 잃은 작은 새를 보았다》는 결국 누덕누덕 자르고 기워진 채로 출판되었다.
그 충격이 너무나 커서 황미나는 한동안 마음을 못 잡고 헤맸다. 동료들과 함께 ‘나인’을 조직하고, 『아홉 번째 신화』를 냈는데도 회복이 안 됐다. 한국 최초의 순정만화잡지 『르네상스』 창간호 작품도, 도저히 《우리는 길 잃은 작은 새를 보았다》 같은 일을 겪을 수 없어서 서구 배경의 시대극 《엘 세뇨르》를 했다. 이후 《무영여객》 《취접냉월》 《웍더글 덕더글》 《슈퍼트리오》 《태백권법》 등 코믹/무협/가족/추리/활극을 연이으면서도 속앓이를 계속하다가, 1993년 일본의 만화잡지 『모닝』에 《윤희》 연재를 시작하고서야 비로소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다. 서울 신촌에서 카페 ‘윤희’를 운영하는 ‘윤희’와 죽마고우 ‘재영’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다양한 사람들의 인생을 농밀하게 풀어낸 이 성인물에서, 황미나는 하고 싶은 이야기, 할 수 있는 표현을 한풀이하듯 쏟아냈다. 당시만 해도 일본 만화계에는 ‘한국 순정만화=일본 소녀만화 아류’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는데, 황미나의 단편집 《상실시대》와 《윤희》는 이러한 인식을 얼마간 제고하도록 만들었다.
생각과 손끝에 한계를 두지 않은 《윤희》가 일본에서 호평을 받고, 내처 차기작 《이씨네 집 이야기》까지 연재를 확정하면서 작가로서의 자존심과 긍지는 얼마간 복구되었다. 그 힘으로 황미나는 1994년 『윙크』에 SF 대작 《레드문》 연재를 시작했다. 가족과 함께 살던 평범한 지구 소년 ‘윤태영’에게 어느 날부터 심상치 않은 사고가 자꾸 일어난다. 이유인즉슨 오래 전 시그너스 별의 왕자 ‘필라르’가 반란으로 왕위를 찬탈 당하고 지구로 도망쳐 왔는데, 때마침 윤태영이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 상태가 되자 그의 몸에 뇌를 이식해 살아왔고, 이를 알게 된 반왕 ‘아길라스’가 태영/필라르를 죽이려한 것이다. 《레드문》은 필라르로서 자기 존재와 능력을 깨달은 태영이 시그너스로 돌아가 억압받는 민중을 구하고 왕위를 되찾는 과정을 그린 대서사로, 중간에 『댕기』로 연재처를 옮겨가며 1998년 완성했다. 살아있는 캐릭터, 촘촘한 플롯, 절정에 오른 데생과 연출력 등 그동안의 공력이 최대치로 발휘 된데다, 좋지 않았던 건강 상태가 작품에 비극적 정조와 절박함까지 불어넣었다.
스케일과 짜임새 면에서 감히 1990년대 최고작이라 할만한 《레드문》은 독자들뿐만 아니라 게임과 영화계를 호렸다. 1997년 이제는 신화가 돼버린 동명의 MMORPG로 개발되었다. 2009년에는 영화제작사 ‘싸이더스FNH’와 판권 계약을 맺었(지만 아직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황미나의 세계가 만화계 너머를 매혹시킨 건 이뿐만이 아니다. 1999년 드라마업계에서는 《우리는 길 잃은 작은 새를 보았다》의 판권을 사들여 김소연, 박용하 주연의 동명드라마로 제작했다. 2016년 문채원, 이진욱 주연으로 <굿바이 미스터 블랙>이 만들어졌다. 그보다 앞선 2012년에는 황미나가 직접 메가폰을 잡고 자신의 웹툰 《보톡스》의 영화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영화배우 박진희와 가수 이준이 캐스팅되면서 당장에라도 크랭크인에 들어갈 듯했으나, 차일피일 제작이 미뤄지며 현재는 오리무중인 상태다.
만화가는 언제까지 이렇게 소재 제공자로만 존재해야 하는가
물론 표절시비도 있었다. 2007년 황미나는 넌버벌 퍼포먼스 “점프”가 《웍더글 덕더글》의 캐릭터, 이미지, 동작 등을 도용했다며 제작사 ‘예감’에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다. 결과는 (역시) 패소. 하지만 곧장 항소했고, 치열한 법정 공방 끝에 2009년 “‘예감’은 황작가에게 합의금을 지불하고, 황작가는 “점프”에 더 이상 저작권 소송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재판부의 조정에 합의했다.
2010년에는 초절정 인기 드라마 <시크릿 가든>과 맞붙었다. 모드라마가 2009년부터 네이버에 연재중인 《보톡스》의 설정-남자주인공이 여주인공의 일터에 찾아가 괴롭힌다, 여주가 패션테러리스트다, ‘발영어’가 나온다, 시가 등장한다-을 갖다 썼다며 돌연 연재 중단을 선언한 것이 발단이었다. “여기저기 표절해 무서워 원고를 못하겠다. 만화가는 언제까지나 이렇게 소재 제공자로만 존재해야 하는지 속이 터진다. 이제는 정말 소재 제공을 그만 두고 싶다.” 이에 대해 드라마 작가 김은숙이 조목조목 반박했고, 두 작품을 비교해 본 사람들도 표절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다만 만화가 열악한 지위로 인해 다른 장르에 끊임없이 아이디어와 소재를 빼앗겨왔고, 그럼에도 명시적으로 그 공을 인정받지 못했던 저간의 사정상, 업계 대모인 황미나의 ‘피해의식’이 이해가 된다는 입장을 보였다.
워낙 상징성이 큰 작가라 일찍부터 만화계 크고 작은 일을 떠맡았다. 2006년 ‘한국만화가협회’ 부회장을 맡았는데, 이전부터 이미 이사 등 여러 직책으로 활동했다. ‘아시아만화가대회’ 같은 국제 교류의 장에는 당연히 불려갔고, 각종 전시회나 회고전, 특별전, 사인회, 대담에도 단골 게스트로 초대되었다. 청보법 같은 중요한 문화예술계 이슈마다 제일 먼저 성명을 내고 행동한 것은 물론이다.
데뷔 30년을 훌쩍 넘긴 지금도 여전히 현역으로, 업계 최전선에서 활약 중이다. 특히 부지불식간에 익힌 일본 만화의 관습을 벗고, 한국 만화가로서 고유한 연출과 표현법을 개발하는 데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