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순정만화 작가 사전] - 강경옥
여성/만화/작가 중심의 ‘한국만화사 다시 쓰기’ 프로젝트, [한국 순정만화 작가사전]이 소개하는 두 번째 작가(군)은 강경옥과 김진, 김혜린과 신일숙입니다. 1980년대 대본소 만화, 소위 ‘만화방 만화’로 데뷔한 이들은 비록 스타일과 세계관은 다를지언정 거대한 역사, 흉포한 세상에 찢기고 부서지면서도 제 의지를 잃지 않는 인간에 깊은 애정을 품었다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대본소시대와 잡지시대를 가로지르며 만화사의 굵직한 걸작들을 쏟아낸 ‘1980년대의 사대천황’. 그중 강경옥은 학원물부터 SF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면서 인간 내면을 집요하게 파고든 ‘심리묘사의 제왕’이었습니다.
데뷔작| 1985년 《현재진행형ing》
대표작| 《별빛속에》 《라비헴 폴리스》 《노말 시티》 《17세의 나레이션》 《펜탈 샌달》 《설희》
인간의 심리묘사에 탁월한 재능을 보이는 작가. 박무직이 그 깊이에 충격을 받아 만화계에 입문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스타가 되고 싶어?》 같은 학원물이든, 《노말 시티》 같은 SF든 특유의 감성으로 덤덤하니 섬세하게 이야기를 끌어간다. 관습에서 벗어난 캐릭터, 담백한 대사, 일상의 한 점에서 파생된 사고와 감정을 삶, 죽음, 존재, 신 등 근원적 질문으로까지 확장하는 능력이 정말 무시무시해서, 다소 취향을 타는 그림체까지 커버하고 있다.
강경옥은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나 실로 자연스럽게 만화가가 되었다. 아동잡지 인쇄부에서 일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이 만화를 접했고, 어린 시절을 만화방에서 보냈다. 초등학생 때 이미 만화를 끼적였고, 중학생 때 습작을 시작했으며, 고등학생 때 김준범, 나예리, 박희정, 유시진, 이강주, 이태행 등과 함께 아마추어 만화동호회 ‘PAC(Pure Aspiration of Comics)’를 조직해 작품을 쌓아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당연한 듯 이진주 문하로 들어가 일을 좀 배우려는데, 어느 날 『여학생』 잡지사에서 연락을 받았다. 종종 투고했던 삽화가 마음에 든다며 연재를 의뢰한 것이다. 그렇게 내놓은 작품이 《현재진행형ing》. 비록 내부 사정으로 4회 만에 중단되었지만 어쨌든 스리슬쩍 데뷔를 했고, 이듬해 대본소 만화 《이 카드입니까》를 발표하며 프로 경력을 시작했다.
1980년대 대표작이자 작가로서 입지를 다진 작품은 《별빛속에》다. 그림이며 연출은 아직 설익지만, 평범한 지구 소녀(인줄 알았는데 실은 다른 별의 왕녀) ‘신혜’가 카피온 행성의 운명을 걸어 맨 여왕이 되기까지의 서사에 계급, 관계, 사랑, 운명 같은 거대담론을 기워 넣는 솜씨만큼은 이미 대가였다. ‘그때는 어려서 대단해보였을지도 모르지’ 하는 의심으로 지금 다시 펼쳐 봐도 결국은 무릎 꿇게 되는 걸작이다. 인간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 차분한 관찰력에서 파생되는 특유의 세계관과 감수성은 이후 도래한 잡지시대에도 유효해서, 《라비헴 폴리스》 《노말 시티》 《17세의 나레이션》 등 빼어난 작품을 낳았다.
그러나 제아무리 대가라도 산업의 영고성쇠 앞에서는 무력했다. 1990년대 중후반 만화/잡지 시장이 몰락하고, 와중에 IMF 금융위기가 닥치고, 와중에 청소년보호법이 시행되고, 와중에 종이에서 웹으로 헤게모니가 넘어가면서 활동에 큰 타격을 입었다. 당장에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마녀에게 심장을 빼앗겨 감정을 느낄 수 없는 공주 ‘시릴’과, 역시 마녀에게 사랑스러움을 빼앗겨 타인에게 배척 받는 왕자 ‘시이크’의 여행담 《퍼플 하트》가 공중에 떴다. 1991년 11월 『미르』 창간호부터 연재한 이 작품은, 1993년 잡지가 폐간되면서 부득이 휴재했다. 2001년 격주간지 『케이크』에서 재연재를 시도하지만, 이듬해 다시 잡지폐간을 맞으며 단행본 두 권만 낸 채 아직까지 미완으로 남았다.
입지와 영향력이 줄면서 표절시비에도 휘말렸다. 2013년 12월 강경옥은 개인 홈페이지에, SBS 인기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가 자신의 작품 《설희》를 표절했다는 글을 올렸다. 2007년 『팝툰』에서 연재를 시작한 《설희》는 《광해군일기》에서 모티프를 얻은 판타지 로맨스로, ‘다음웹툰’으로 연재처를 이동했다가 2016년 10월 '레진코믹스'에서 맺음한 작품이다. 강경옥은 “누구나 《광해군일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을 수는 있지만, 주인공이 400년 간 늙지 않고 지구에서 살아온 것, 전생의 인연과 얼굴이 같은 사람을 만난 것, 그 사람이 인기 배우라는 것 등은 자신이 만든 구성안”이라면서 “세상에 법적인 심판대뿐 아니라 도덕적 심판대도 있다는 걸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드라마 작가 박지은이 사실무근이라고 반발하며 표절시비는 작가와 제작사를 상대로 한 3억 원 손해배상청구소송으로 번졌다.1 하지만 방송사와 제작사가 뻑적지근한 ‘언플’과 달리 합리적인 중재안을 내놓는 바람에, 소송은 3개월 만에 싱겁게 끝났다.2
이처럼 온갖 풍파에 시달리면서도 강경옥은 자신의 작품세계만큼이나 차분히 제 길을 갔다. 1999년부터 2000년까지 『케이크』에 《두 사람이다》를 연재했다. 가까운 사람에게 살해당할 것이라는 저주를 받은 한 집안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욕망과 그로써 파생된 질투와 살의 등 어두운 감정들은 짚은 스릴러로, 2007년 윤진서, 박기웅 주연의 동명 영화로 제작되었다. 2000년 ‘한국여성만화가협회’ 회장직을 맡았고, 2002년부터 몇 년 간 명지대 사회교육원에서 만화를 가르쳤다. 2003년 교양만화 《키다리 아저씨》(삼성출판사)를 그렸으며, 2004년에는 이제는 가고 없는 포털사이트 ‘엠파스’에 《버츄얼 그림동화》를, 2007년 ‘와이비미디어’에 《무엇이 필요하십니까》를 연재했다. 근작은 2016년 “네이버 한국만화거장전: 만화보물섬”에 업로드한 <갇혀진 시간>이다.
참고
1. 공교롭게도 박지은 작가는 2016년에도 표절시비에 휘말렸다. 시나리오 작가 박기현은 박지은 작가의 <푸른 바다의 전설>이 자신의 장편영화 시나리오 ‘진주조개잡이’를 베꼈다며 2017년 1월 고소장을 제출했다. ‘인어의 초인적 능력, 남자주인공의 가족사, 남자 인어의 등장, 뭍으로 올라 온 인어가 도둑으로 몰려 경찰서에 갇히자 남자주인공이 구해내는 장면’ 등 총 예순세 가지 부분이 일치한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박작가는 “<푸른 바다의 전설>은 설화집 《어우야담》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작품”이라면서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했다. 2017년 8월 서울중앙지검은 “박지은 작가나 제작사 측이 사전에 고소인이 표절대상으로 주장하는 영화 시나리오를 보거나 그 존재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없었고, 고소인의 시나리오와 ‘푸른 바다의 전설' 드라마 사이에는 유사한 부분이 없다고 판단”해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장아름, “‘푸른 바다의 전설' 측 “표절 무혐의 처분…무고 대응 검토””, 뉴스1, 2017.8.30.
2. 후일담에 따르면, 강경옥은 중재 안이 합리적이기도 했지만 소송에 창작의 동력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합의에 응했다. https://blog.naver.com/kko314
1980년대 사대천황 ② [한국 순정만화 작가 사전] - 김진
1980년대 사대천황 ③ [한국 순정만화 작가 사전] - 김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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