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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사주 Sep 22. 2017

1980년대 사대천황 ③

[한국 순정만화 작가 사전] - 김혜린

여성/만화/작가 중심의 ‘한국만화사 다시 쓰기’ 프로젝트, [한국 순정만화 작가사전]이 소개하는 두 번째 작가(군)은 강경옥과 김진, 김혜린과 신일숙입니다. 1980년대 대본소 만화, 소위 ‘만화방 만화’로 데뷔한 이들은 비록 스타일과 세계관은 다를지언정 거대한 세상, 흉포한 세상에 찢기고 부서지면서도 제 의지를 잃지 않는 인간에 깊은 애정을 품었다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대본소시대와 잡지시대를 가로지르며 만화사의 굵직한 걸작들을 쏟아낸 ‘1980년대 사대천황’. 그중에서 김혜린은 과거와 미래가 혼재하는 역사의 과도기에 줄곧 시선을 고정한 채, 상처받은 이들 하나하나를 끌어안아준 작가였습니다.  



데뷔작| 1983년 《북해의 별》

대표작| 《비천무》 《불의 검》 《겨울새 깃털 하나》 《테르미도르》 



대하사극의 일인자. 특히 격동의 시대, 실패가 예정된 운명으로 뛰어드는 연약하면서도 강인한 인간을 그리는 데 일가견이 있다. 서늘한 선, 처연한 그림체, 신파조의 문어적 대사/독백/내레이션이 특징이며, 이 모두가 한데 어우러져 가뜩이나 비극적인 정조를 더욱 고조시킨다.



                                                    괴물 신인의 탄생


김혜린은 1962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귀자다. 진주 소재의 사범대 재학 시절 취미로 혼자 그림을 그리다가, 서울 사는 황미나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만화계와 접속했다. 그때부터 가끔 서울로 올라와 황미나 화실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친분을 쌓았고, 그렇게 만난 사람들과 만화동인 ‘나인’을 조직했다. ‘나인’은 만화가 ‘연극, 회화, 무용, 건축, 문학, 음악, 사진에 이은 아홉 번째 예술’이라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다.  


괴물 같은 데뷔작은 대학 2학년이던 1983년에 발표한 《북해의 별》이다. 로코코시대 북유럽의 가상 국가 보드니아에서 일어난 시민혁명을 담은 작품으로, 역사적 혼란기, 파란만장한 인생, 고결한 영웅, 알고 보면 다들 가여운 캐릭터 등 김혜린 세계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지금 아닌 과거, 여기 아닌 저곳, 실제가 아닌 가상의 국가를 배경으로 삼은 이유는 《베르사유의 장미》 같은 일본 소녀만화의 영향도 있겠지만, 전두환 신군부의 삼엄한 시선을 의식해서가 아닐까 싶다. 

허구를 빌미로 검열을 피하고서 《북해의 별》은, 그 시절 군사정권에 맞서 민주화투쟁을 벌이던 운동권들의 필독서가 된다. 다만 엄청난 스토리와 달리 그림과 연출은 종종 뜨악하다 싶을 만큼 어설픈데, 다행히 한 권 한 권 나올 때마다 실력이 부쩍 늘어서 마지막권에 이르면 과연 1권을 그린 사람과 동일인물인가 싶을 정도로 발전해 있다. 


김헤린의 괴물같은 데뷔작. 로코코시대 북유럽의 가상 국가 보드니아에서 일어난 시민혁명을 그린 작품으로 1980년대 운동권 대학생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꿈꾸는 시대, 꽃을 뿌려주고픈 사랑의 이야기

                                       

“사람 잡는 무기라 소름 돋는 일이어도, 내 님 피일랑 아끼고 우리 봄 활짝 피게 도움 닿는 일이라면 나는 누가 뭐라건…… 얼마든지 불과 벗해 불과 싸워나갈 수 있어.”《불의 검》


5년에 걸쳐 《북해의 별》을 마치자마자 김혜린은 숨 돌릴 틈 없이 차기작에 돌입했다. 곧 작가의 마지막 대본소 만화이자, 어쩌면 한국 최초의 ‘무협을 가미한 동양 배경 순정사극’ 《비천무》다. 


《북해의 별》에서 《비천무》에 이르기까지 한국 정치사회의 격변은 컸다. 그 정점이던 1987년, 대학생 박종철이 반정부시위를 했다는 이유로 고문을 받다 숨졌다. 역시 대학생이었던 이한열은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다. 그런데도 신군부가 반성은커녕 독재권력을 포기하지 않자, 6월 10일 시민 백만 명이 거리로 뛰쳐나와 독재 종식을 요구했다. 시위는 스무날 가까이 계속되었고, 정부는 마침내 6월 29일 “시민들의 요구를 수용하겠다”며 백기투항했다. 시민으로서, 작가로서 피투성이 시대를 관통한 김혜린은 “지극히 통속적인 이야기에 (…) 사랑하는 역사, 꿈꾸는 시대, 슬퍼하는 것들, 노여워할 수밖에 없는 것들, 꽃을 뿌려주고픈 사랑들을 (…) 누군가가 같이 공명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1 엮어 넣었다. 1340년대 중국 원명 교체기, 각자의 이해에 따라 이전투구가 벌어지는 전장에서 장군의 서녀庶女 ‘설리’와 몰락 가문의 자제 ‘진하’가 이룬 애틋한 사랑은, 시퍼런 현실에 대한 일종의 위무였던 것이다. 《비천무》는 2000년에는 김희선, 신현준 주연의 영화로, 2008년에는 박지윤, 주진모 주연의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이후로도 김혜린의 시선은 줄곧 과거와 미래가 혼재하는 과도기, 그 혼란에 찢기고 부서지면서도 기어이 새로운 것을 길어 올리려는 인간의 삶과 의지에 머물렀다. 《테르미도르》에서는 프랑스 혁명기에 로베스피에르 일당의 공포정치에 맞서 ‘테르미도르 반동’을 일으킨 온건파들에 집중했다. 《불의 검》에서는 청동기에서 철기로 넘어가던 기원전 700년 경 북만주를 배경으로 전쟁, 사람, 사랑을 그렸다. 일제강점기에 근거한 《광야》, 여말선초가 배경인 《인월》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주인공들의 생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읽는 것만으로도 진이 다 빠질 지경이다. 


중국의 원명 교체기, 원수집안의 아들딸 진하와 설리의 사랑이야기를 통해 김혜린은군부독재라는 현실을 살아낸 동시대인들을 위무했다.  


한편, 한결같은 작가와 달리 시장은 급변했다. 연재처가 사라지고, 플랫폼이 달라졌다. 그바람에 가뜩이나 작품 수도 적은데 휴재와 연재중단이 계속되었다. 이를테면 《불의 검》은 1992년 『댕기』에서 연재를 시작한 후 ‘잡지폐간->연재처 이동->폐간->연재처 이동’의 지난한 과정을 12년이나 반복한 끝에 간신히 결말을 맺었다. 그 자체가 얼마나 기적이고 감격이었는지, 기념우표까지 발행했다. 

1992년 『르네상스』에 연재한 《아라크노아》, 1998년 『이슈』에 선보였다가 『화이트』로 연재처를 옮긴 《광야》, 2009년 『팝툰』에서 시작한 《인월》의 운명도 다르지 않았다. 그나마 《광야》는 2003년과 2014년 웹진 ‘We6’와 『보고』에 잠깐씩이라도 연재를 재개했지만, 《아라크노아》는 영영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에 김혜린은, 과거 작가의 자유로운 창작을 북돋고 안정적으로 연재처를 확보하고자 『아홉 번째 신화』를 냈듯이, 2003년 김광성, 김기혜, 김진, 장태산과 함께 ‘We6’를 만들었다. ‘작가 다섯과 독자, 당신을 포함한 우리 여섯’이라는 뜻이었지만, 이전과 같은 지지와 호응을 끌어내지 못했다. 


1999년 ‘한국여성만화가협회’ 회장으로 일했고, 2005년 뮤지컬 <불의 검>의 작사와 대본을 맡았다. 2015년 “네이버 한국만화거장전: 순정만화특집”에 <기억>을, 2016년 “한국만화거장전: 만화보물섬”에 <Eternal>을 냈다. 2017년 현재 『이슈』에 《인월》을 연재하고 있다.



참조


1996년 서점용 단행본으로 《비천무》를 발간할 때 쓴 ‘작가의 말'



1980년대 사대천황 ① [한국 순정만화 작가 사전] - 강경옥


1980년대 사대천황 ② [한국 순정만화 작가 사전] - 김진


1980년대 사대천황 ④ [한국 순정만화 작가 사전] - 신일숙


[한국 순정만화 작가 사전] : 여성/만화/작가 중심의 한국 만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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