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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사주 Sep 19. 2017

1980년대 사대천황 ②

[한국 순정만화 작가 사전] - 김진

여성/만화/작가 중심의 ‘한국만화사 다시 쓰기’ 프로젝트, [한국 순정만화 작가사전]이 소개하는 두 번째 작가(군)은 강경옥과 김진, 김혜린과 신일숙입니다. 1980년대 대본소 만화, 소위 ‘만화방 만화’로 데뷔한 이들은 비록 스타일과 세계관은 다를지언정 거대한 역사, 흉포한 세상에 찢기고 부서지면서도 제 의지를 잃지 않는 인간에 깊은 애정을 품었다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대본소시대와 잡지시대를 가로지르며 만화사의 굵직한 걸작들을 쏟아낸 ‘1980년대 사대천황’. 그중 장르와 매체, '극화체'와 '만화체', 시대와 종을 가리지 않고 동시다발적 연재를 감행했던 '멀티플레이어'로서 김진은, 침착한 검은 눈동자를 지닌 (남성) 주인공을 통해 좁게는 가족의, 넓게는 역사의 비극을 가만히 응시한 작품들로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데뷔작| 1983년 《바다로 간 새》 

대표작| 《바람의 나라》 《레모네이드처럼》 《황혼에 지다》 《신들의 황혼》 《숲의 이름》 《1815》



본명은 김묘성. 팬클럽명은 ‘별님사랑’이다. 1960년 서울, 서점하는 집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마음껏 만화책을 보며 자랐다. 초등학생부터 만화를 끼적이면서도 딱히 만화가가 돼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다가, 대학 1학년 때 문득 결심을 굳혔다. 이후 무작정 원고를 만들어 출판사 문을 두드렸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하지만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아 ‘한국만화가협회’로부터 김형배를 소개받았고, 그의 도움으로 1983년 『여고시대』 잡지에 《바다로 간 새》 연재를 시작했다. 하지만 만화가가 되는 길이 문하생을 거치는 것밖에 없던 시절 파격적인 루트로 데뷔한 만큼 리스크도 컸다. 그림이며 연출이 ‘수준미달’이라는 혹평 끝에 연재가 6회 만에 중단된 것이다. 스스로도 부족함을 깨닫고 1년 간 노력정진의 시간을 보낸 김진은, 1985년 《별의 초상》으로 돌아와 참았던 숨을 토하듯 쉬지 않고 작품을 쏟아냈다. 


김진의 '실질적인' 데뷔작. 의욕만으로 시작한 《바다로 간 새》가 '수준미달'이라는 혹평 끝에 연재 6회 만에 중단되자, 1년 간 실력을 연마한 끝에 내놓았다.


국가, 시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워낙 종횡무진한 탓에 스타일을 특정하기는 어렵다. 이 잡지에 묵직한 멜로드라마를 연재하면서, 저 잡지에 쾌활한 코미디를 연재했던 진정한 멀티플레이어였다. 그럼에도 굳이 경향을 따진다면, 일단 정서가 가볍지 않다. 『르네상스』에 '진아'라는 필명으로 연재한 《조그맣고 조그맣고 조그마한 사랑이야기》처럼 토끼를 의인화한 귀여운 작품이든, 《푸른 포에닉스》처럼 대놓고 진지한 작품이든 그렇다. 먹과 스크린톤을 잔뜩 바른 표현주의적(?) 작화 탓일 수도 있겠지만(얼마나 톤을 많이 쓰는지, 혹설에 따르면 작업실 한쪽 벽면에 늘 스크린톤이 가득 쌓여있었다고 한다), 세상에 대한 작가의 근본적인 관점, 입장, 태도에서 비롯된 듯싶다. 

연출은 힘이 있으면서 그리 친절하지 않고, 또 다른 의미에서 신파조의 대사/독백/내레이션은 행간이 넓으면서도 요상하게 정보가 많아 읽기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했다. 음성지원이 된다면 틀림없이 나직했을 목소리와 침착한 검은 눈동자의 주인공들은 우울과 자기파괴 충동에 시달리는 일이 흔했다. 그들의 문제와 비극의 근원으로 부자관계가 자주 불려왔는데, 《바람의 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초기 고구려'라는 전인미답의 시대를 서사에 끌어오다


《바람의 나라》는 고구려 유리왕의 아들 ‘무휼’이 대무신왕이 되까지를 그린 대하 역사 판타지다. 초기 고구려와 대무신왕이라는 전인미답의 시대와 인물에, 사신1이라는 날개를 달고서 권력, 전쟁, 존재, 고독, 사랑 등의 이야기를 담았다. 왕좌를 위해 태자 ‘해명’에게 죽음을 명한 유리왕. 그런 아버지를 애증하며 자신은 기필코 다른 길을 가리라 마음먹지만, 끝내 같은 선택을 하는 아들 '무휼'. 아버지를 넘어서기 위해 자기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하지만 그로써 결국 아버지를 닮아가는 아들의 비극적인 숙명을 담은 《바람의 나라》는, 1992년 『댕기』에서 연재되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끈 것은 물론 게임으로, 뮤지컬로, 드라마로, 소설로 곁가지 쳐 나갔다.

우선 1996년 게임개발 회사 ‘넥슨’이 한국만화사 최초로 《바람의 나라》를 바탕으로 한 MMORPG2를 출시했다. 2001년에는 동명의 뮤지컬이 제작되었는데, 김진이 대본과 작사를 맡았다. 2004년 작가가 직접 번안한 소설이 나왔고, 2007년 기왕의 그림을 보정하고 새로운 에피소드를 끼워 넣은 스페셜에디션을 냈다. 2008년에는 최정원, 송일국 주연의 드라마가 제작되었다. <태왕사신기>와의 표절시비는 그 사이에 불거졌다.


<태왕사신기>는 고구려 광개토왕이 사신의 도움을 받아 태왕이 되기까지를 그린 판타지 무협 사극으로, 2007년 MBC에서 방영되었다. 시놉시스가 나오자 김진은 <태왕사신기>가 초창기 고구려를 배경으로 삼은 점, 전설의 동물인 사신을 인간으로 치환한 점, 사신의 성격과 관계가 만화와 유사한 점, 주인공이 이들의 도움으로 어려움을 딛고 왕이 된다는 점, 최종목표가 ‘신시’(만화에서는 ‘부도’)를 회복하는 것이라는 점 등이 《바람의 나라》와 비슷하다면서, 2005년 5월 드라마 작가 송지나를 상대로 5,000만 원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다. 결과는 패소. “역사적 배경, 신화적 소재, 영토 확장과 국가적 이상의 추구라는 주제 등 아이디어의 영역에 속하는 요소를 공통으로 할 뿐, 등장인물이나 주변 인물과의 관계 설정 등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는 창작적인 표현 형식은 실질적으로 유사하지 않다”는 이유였다. 이 판결로 만화계가 입은 내상은 치명적이었다. 김진 정도의 스타 작가가 재판에서 졌다는 것은 창작물로서 만화가 고유성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할뿐더러, 향후 비슷한 시비가 벌어질 경우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이길 확률이 거의 없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만화계는 이후 소모적인 표절논쟁에 끊임없이 휘말리게 된다. 한편 《바람의 나라》는 1996년 6월 만화/잡지시장의 칼바람에 『댕기』가 폐간된 후 ‘애니메이션 전문잡지 『월간 모션』에서 연재->잡지 폐간으로 중단->‘코믹스투데이’에서 연재->폐간으로 중단->‘We6’에서 연재->폐간으로 중단’의 지난한 과정을 거친 끝에, 2017년 현재 ‘이코믹스’에서 스페셜에디션으로 연재하고 있다. 


명실상부 김진의 대표작. 초기 고구려 대무신왕이라는 전인미답의 시대와 인물을 한국의 대중 서사에 처음으로 끌어들였다.


왕성한 정력으로 작품 활동을 한 만큼(그러나 완결지은 작품이 매우 적다는 게 비극이다), 외부 활동도 열심이었다. 1995년 명지대 사회교육원 만화창작과 지도교수로 있었다. 1997년 ‘여성만화인협의회(현 한국여성만화가협회)’를 조직하고 초대회장직을 맡았다. 청소년보호법에 맞서 여성/만화/작가들의 연대를 도모하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 작가들보다 더 적은 고료를 받는 부당한 관행과 처우 등에 함께 맞서려는 취지였다. 2006년 김기혜, 김혜린, 김광성, 장태산과 함께 웹진 ‘We6’를 제작했고, 네이버 "한국만화거장전: 순정만화특집”과 "한국만화거장전: 만화보물섬"에 <印受>과 《푸른 포에닉스》의 외전  <호모 루덴스>를 실었으며, 2016년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 홍보대사로 활동했다. 



참조


1 四神은 동서남북 사방의 성좌를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등 동물형상으로 나타낸 동양 사상으로, 만화에서는 의인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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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사대천황 ① [한국 순정만화 작가 사전] - 강경옥


1980년대 사대천황 ③ [한국 순정만화 작가 사전] - 김혜린


1980년대 사대천황 ④ [한국 순정만화 작가 사전] - 신일숙


[한국 순정만화 작가 사전] : 여성/만화/작가 중심의 한국 만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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